은행 위기의 불길이 잡히지 않고 있는 미국에서 ‘그림자 은행’ (shadow bank)이 점점 공룡으로 커가고 있다. 그림자 은행 또는 그림자 금융은 은행과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은행이 아닌 헤지펀드·사모펀드·특수목적법인 등의 금융회사를 말한다. 그림자 은행은 기존 은행처럼 미국 정부 당국의 규제를 받지 않아 은행보다 자유롭게 영업한다. 이 그림자 은행도 기존 은행처럼 연방준비제도(Fed, 연준)의 연쇄 금리 인상으로 수익성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뉴욕 타임스(NYT)는 7일(현지시간) “은행 위기 속에 금리자 은행들이 몸집이 갈수록 커지고 있고, 아폴로와 블랙스톤과 같은 사모펀드 붐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NYT는 “지난 10년 동안 그림자 은행이 공격적인 투자금 유치와 초장기 대출 등을 통해 급성장했고, 2013년 이후 현재까지 사금융 시장이 6배가 늘어나 그 규모가 8500억 달러 (약 1128조 원)에 달했다”고 전했다.
섀도우 뱅킹(shadow banking)은 투자 은행, 헤지펀드, 사모펀드, 은행의 투자 전문 자회사 (SIV) 등과 같이 은행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런 그림자 금융업체가 구조화채권을 비롯한 ‘고수익-고위험’ 채권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새로운 유동성을 창출한다. 그러나 일반 금융 시장과 달리 투자 대상의 구조가 복잡하고, 손익이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그림자 금융이라 불린다. 비은행 금융 기관은 연금펀드와 보험사, 헤지펀드, 뮤추얼 펀드 등을 아우르고, 가계와 기업을 대상으로 대출 업무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국에서 실리콘밸리은행(SVB), 시그니처 은행, 퍼스트 리퍼블릭 은행이 연쇄 파산하고, 일부 지역은행들이 파산 위기에 몰리면서 기존 은행들이 대출을 꺼리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신용 경색이 악화하고 있어 사금융 시장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고 NYT가 보도했다. 미국의 중소 은행이나 지역은행은 예금주들이 일시에 예금을 찾아가는 뱅크런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 은행에서 빠져나간 예금 일부가 대형 은행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형 은행도 미국의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기 전에 이뤄진 대출금 문제로 인해 추가 대출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뉴욕 타임스는 “대출이 은행에서 비은행(nonbank)으로 넘어가는 데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서 “특히 이들 비은행이 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 2008년 금융 위기를 계기로 은행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했다. 그러나 그림자 은행은 그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NYT는 “미국에 경기 침체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은 비은행이 은행 역할을 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사모펀드 아폴로가 은행처럼 대출해준 자금이 무려 3920억 달러 (약 520조 1800억 원)에 달한다고 이 신문이 지적했다. 아폴로 자회사인 아틀라스 AP 파트너스는 현재 파산설에 시달리고 있는 웨스트팩 은행에 14억 달러를 지원했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블랙스톤이 관리하는 신용 및 보험 자산이 2910억 달러에 이른다.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에 이르자 미국 유명 사모펀드 회사들이 SVB 인수전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다. 블랙스톤 그룹,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 KKR, 카알라일 그룹 등이 SVB 인수에 관심을 보였다고 미국 언론이 전했다.
그림자 은행 간 거래도 활발하다. NYT는 그림자 은행의 핵심 고객이 또 다른 그림자 은행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은행들이 대출 분야에서 발을 빼면서 비은행 간 직접 대출이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미국에서 상업용 부동산 대출 위기가 고조되면서 그림자 은행이 지역은행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모건 스탠리에 따르면 미국 지역은행 대출의 4분의 3을 상업용 부동산 대출이 차지한다. 모건 스탠리는 향후 2년 동안 만기가 돌아오는 상업용 부동산 대출 규모가 1조 5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그림자 은행은 또한 기존 은행들이 신용 불안을 이유로 대출해주지 않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늘리고 있다. 그림자 은행은 특히 대출 절차를 간소화하고, 신속하게 대출해주는 방식으로 고객을 늘려나가고 있다. NYT는 “이 정도 규모의 직접 대출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으로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이제 금융권 혼란이 은행을 넘어 확산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WSJ은 그림자 금융도 막대한 부채를 보유하고 있어 이들이 새로운 금융권 위기를 일으킬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4월 초 발행한 보고서에서 그림자 금융이 가진 잠재적 위험을 지적했다. IMF에 따르면 자산운용사가 펀드를 활용해 대출하는 형식 등의 직접 대출은 2008년 초보다 6배 증가한 1조 5000억달러로 늘었다. 고수익 채권과 레버리지 대출 시장까지 더하면 그림자 금융 시장 규모는 4조 4000억 달러에 달한다. 은행의 상업 및 산업 대출 규모인 2조 7000억 달러보다 많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실리콘밸리은행(SVB)과 시그니처은행 연쇄 파산 사태 이후 중형 규모의 지역은행에 대한 당국의 감독 강화를 지시했다.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은 은행뿐 아니라 머니마켓펀드(MMF), 헤지펀드, 가상화폐까지 포괄적으로 거론하면서 이들 '그림자 금융'에 대한 규제 필요성을 제기했다.
국기연 글로벌이코노믹 워싱턴 특파원 ku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