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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핵심은 가치판단 내리기…옳음·그름은 문화 따라 달라지는 것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177회)] 부끄러움의 회복

노정용 기자

기사입력 : 2020-01-15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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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문화는 관계에 비중을 두고 있는 반면에 서양은 개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조금 거칠게 비교하자면, 일반적으로 동양을 ‘수치심’의 문화로 그리고 서양을 ‘죄의식’의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문화의 핵심은 ‘나’와 ‘너’가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 관계를 잘 맺으면 즐거움이나 행복감 등 긍정적 감정을 느낀다. 반대로 이 관계가 불편하면 수치심이나 죄의식 등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이때 ‘나’와 ‘너’ 중에서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두고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관계중심’의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로 대별된다. ‘관계중심’의 문화에서는 ‘나’보다 ‘너’를, 그리고 ‘개인중심’의 문화에서는 ‘너’보다 ‘나’를 더 중시한다. 물론 어느 문화에서나 ‘나’나 ‘너’를 완전히 무시하고 관계를 맺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은 본질적으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너’가 완전히 배제되면 더는 관계가 아니다. 단지 홀로 존재하는 것뿐이다.


문화의 핵심은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옳음’과 ‘그름’의 판단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한 문화에서는 옳은 행동이 다른 문화에서는 틀릴 수 있다. 대인관계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동양에서는 자신(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너)에게 어떻게 보일지가 중요하다. 즉, 옳고 그름의 판단의 기준이 너에게 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괜찮다고 여기면 나의 행동은 괜찮은 행동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하면 나의 행동은 그릇된 것이 된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게 평가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수치심’을 느낀다.

대조적으로, 서양에서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나’가 된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기준이 더 우선한다. 비록 다른 사람이 옳다고 판단하더라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볼 때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다 틀리다고 비난하더라도 자신의 판단기준에서 볼 때 옳은 것이면 옳은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죄의식’이 더 강하게 발달한다.

​나와 너가 관계 맺은 방식이 문화 핵심
잘 맺으면 즐거움 행복감 등 긍정적 감정

동양의 석학 맹자(孟子)에 의하면, “羞惡之心 義之端也(수오지심 의지단야)”이다. 즉,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端緖)이다” 그만큼 동양에서는 부끄러움(수치심)이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되는 기본이다. 맹자(孟子)에 의하면, “羞惡之心 義之端也(수오지심 의지단야)”이다. 즉,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端緖)이다” 그만큼 동양에서는 부끄러움(수치심)이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되는 기본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나’ 이면 ‘자율(自律)’이 되고, ‘너’가 되면 ‘타율(他律)’이 된다. ‘자율’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지배나 구속을 당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거나 또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여 절제하는 일”이다. 인간은 원칙에 따라 행동을 하거나 절제해야 한다. 다만 그 원칙이 누구에 의해 정해지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나’가 주체(主體)가 되면 자율이고, ‘나’가 객체(客體)가 되면 타율이다.


자율과 타율의 개념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면 자율은 긍정적이고 타율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자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타율을 배제해야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율과 타율의 관계는 어느 하나가 약해져야 다른 것이 높아지는 일차원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자율이나 타율 어느 한 쪽이 없다면 더 이상 ‘율(律)’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원칙’ 자체가 없는 상태가 된다.

자율과 타율은 상대적인 것이다. 자율과 타율은 ‘나’와 ‘너’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어느 것이 더 강한지에 의해 결정된다. 타율보다 자율이 강하면(나>너) 한마디로 자율적이고, 타율이 조금이라도 더 강하면(너>나) 타율적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개인이나 조직이 자율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타율적인 특징보다 자율적인 특징이 조금 더 강하다는 뜻이다.

​서양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은 '나'가 돼
다른 사람들 판단보다 자신 판단이 우선

교보문고가 최근 발표한 10년치(2010~2019년) 베스트셀러에서 『미움받을 용기』가 4위, 『82년생 김지영』이 8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9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런 종류의 책들의 공통된 주제는 “남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충고를 하는 책들이다. 이 중 제일 호응을 많이 받은 『미움받을 용기』는 일본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가 아들러(Adler) 심리학을 쉽게 풀어 설명한 책이다. 『미움받을 용기』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많은 독자들에게 호응을 받은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 나라가 공통적으로 ‘관계 중심적’ 문화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나’보다 ‘너’의 판단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수치심’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율보다는 타율이 더 강하게 작용할 소지가 많다.

정신의학자 아들러(Alfred Adler)는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융(Carl Jung)과 더불어 초기 정신의학계에 큰 공로를 세운 분이다. 프로이트와 융이 ‘개인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intra-personal) 심리적 역동’에 초점을 맞춘데 비해, 아들러는 ‘개인 간 관계에서 일어나는(inter-personal) 심리적 역동’에 초점을 맞춘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를 발전시켰다.

어렸을 때부터 신체적인 약점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린 아들러는 ‘열등감’과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 즉 ‘우월성’을 추구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이론을 주창하였다. 열등감은 다른 무엇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열등감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너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이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러의 주장대로 성숙한 ‘우월성’은 ‘사회적 관심’의 폭으로 나타난다. ‘성숙함’은 ‘배려(配慮)’ 와 동의어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앞으로 자율성을 키우고 다른 사람들의 판단보다는 자신을 믿고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라는 조언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 필요성은 충분히 이해하면서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것은 자율과 타율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자율성이 확보되기 위해 타율성은 불필요하고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너무 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율’이 전제되어야만 ‘자율’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은 ‘타율’이라는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만약 타율이 없다면 자율이 아니라 ‘방종’으로 빠진다. 부끄러움(수치심)을 모르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오만(傲慢)하고 방자(放恣)한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되는 지름길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하지만 아들러의 주장대로 성숙한 ‘우월성’은 ‘사회적 관심’의 폭으로 나타난다.

​자율과 타율의 개념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면

자율은 긍정적, 타율은 부정적으로 보여

요즘 우리 사회는 ‘자율성’ 과잉의 상태가 아닌지 염려가 된다. 물론 오랫동안 억눌려온 ‘타율’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리고 당연히 앞으로도 자율성을 계속 키워나가야 한다. ‘나’의 삶은 나의 가치에 따라 내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이나 조직에서 개인의 선택권을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자율과잉’ 상태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억눌렸던 스프링이 더 높이 튕겨오르는 것처럼 ‘반동형성(反動形成)’이기 때문이다.

‘자율과잉’ 상태는 ‘오만무도’한 상태와 유사어이다. 거기에는 ‘너’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너’가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그 곳에는 가치 판단(律)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도 없는 상태가 된다. ‘부끄러움’이 없는 곳에는 ‘수심(獸心)’만 있다. 더 이상 ‘옳고 그름(義)’이 없는 곳이 된다.

소설가 박완서님의 안타까움처럼 새해에는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차츰 몸이 더워 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전신이 마비됐던 환자가 어떤 신비한 자극에 의해 감각이 되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필시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오리라. 그리고 이렇게 환희롭게 나는 내 부끄러움의 통증을 감수했고, 자랑을 느꼈다...나는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붉게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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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열 고려대 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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