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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남한산성의 봄을 찾아서

백승훈 기자

기사입력 : 2020-02-1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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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는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고 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다음 날,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남한산성을 찾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은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숲과 누비길이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산성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남문으로 불리는 지화문을 향해 걸었다. 도로 위 한편으로 야자수 섬유 멍석이 깔려서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그런데도 일행 모두가 숲 해설가이다 보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어 걷는 속도는 마냥 늘어진다. 산길 어디선가 복수초나 봄까치꽃 같은 이른 봄꽃을 만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은 표정들이다.


남문을 통과하니 느티나무 고목이 우리를 반겨준다. 느티나무는 늙어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고 해서, 늦게 트인다고 해서 느티라는 이름을 얻은 나무다. 대체로 빨리 자라는 나무는 속이 무른 편인데 느티나무는 빨리 자라면서도 속이 단단하다. 느티나무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 오르며 뒤돌아보니 용트림하듯 능선을 따라 이리저리 휘어진 성벽 너머로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이 눈에 들어온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는 언제 봐도 든든하지만 간밤 비에 씻겨서인지 솔빛이 한층 푸르다. 남한산성의 소나무 숲은 아름다운 숲에 선정될 만큼 유명하다. 남문에서 수어장대를 지나 서문, 북문, 동장대로 이어지는 80~90년생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72㏊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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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외에도 남한산성을 지켜온 나무는 많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서어나무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서어나무는 예전에는 숲의 바람막이이자 땔감으로 최고였다. 머슬 트리(muscle tree)라는 별명을 지닌 서어나무는 모진 비바람과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나무답게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근육을 자랑한다. 서어나무는 숲이 변하는 천이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안정적인 숲을 이루는 우두머리 나무다. 하지만 단단한 놈이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처럼 서어나무는 빨리 썩는 단점으로 300년 이상 버티기는 힘든 나무다. 대신에 죽은 서어나무에는 밤이면 초록색 빛을 내는 화경버섯이란 특이한 버섯이 자란다. 화경이란 이름은 밤이 되면 불빛이 거울처럼 반사되어 나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멸종2급으로 지정된 식물로 독버섯이다.

이외에도 숲속엔 참으로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모여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숲이 채 겨울빛을 버리지 못할 때 제일 먼저 잎을 틔워 연둣빛 봄기운을 불어넣는 귀룽나무를 비롯하여 오리나무, 박달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산딸나무, 층층나무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꽃을 좋아하다 보니 꽃을 보면 무슨 나무인지 쉽게 알 수 있는 것도 잎과 꽃이 없는 겨울엔 나무들의 이름을 알아맞히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잎과 꽃이 없는 겨울엔 나무의 수피나 열매, 겨울눈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름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나무의 겨울눈은 잎이나 턱잎이 변해서 발달한 것인데 비늘처럼 보이는 작은 조각인 인편에 들러 싸여 있다. 벗들과 겨울눈을 따서 맛을 보기도 하며 나무 이름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여 비탈진 오르막도 숨찬 줄 모르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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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꼼꼼히 살피며 한나절을 걸었는데도 남한산성엔 아직 꽃은 피지 않았다. 겨우 찾아낸 것이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생강나무 꽃망울이 전부였다. 우리가 기다려도,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찾아오고 나무들은 메마른 가지에 싹을 틔워 숲엔 한바탕 초록 불길이 번져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무를 알아가는 이유는 알아볼수록 숲에 대한 애정이 생기기 때문이고 자신과 나무와의 역사가 쌓이기 때문이라고 함께 간 벗은 말했다. 다시 남한산성을 찾을 땐 나무들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먼저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하고 싶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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