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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칼럼] ‘봉급+용돈’ 받으며 다니던 학교

이정선 기자

기사입력 : 2020-04-0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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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이코노믹 자료사진.
이른바 ‘신식교육’이 시작된 100여 년 전 ‘개화기’ 때의 학교는 ‘짱’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줬을 뿐 아니라, 학비와 교재, 연필, 공책 등 학용품까지 ‘공짜’였기 때문이다.


그 정도였다면 ‘짱’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 ‘봉급’까지 지급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장학금’을, 그것도 ‘매달’ 지급했다. 대부분의 학교가 그랬다.

그 정도를 가지고도 ‘짱’이라고 할 수 없었다. ‘봉급’과는 별도로 추가로 ‘용돈’까지 지급했다. 그것도 ‘매일’ 용돈을 줬다.

따라서 학생들은 몸만 있으면 되는 곳이 학교였다. 그랬으니 ‘짱’이 아닐 수 없었다.

‘관립 의(醫)학교’라는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매달 6원의 ‘급여’를 지급했다. 경찰관인 ‘순사’의 봉급이 5원이었던 당시였다. 6원이면 적지 않은 봉급이었다.


학생들은 이 급여에서 기숙사비 등 숙식비 3원을 냈다고 한다. 따라서 3원을 내고도 3원이 남았다. 학교만 다니면 매달 3원씩 벌 수 있었다.

게다가 학생들에게는 매일 점심과 담뱃값으로 6전씩 지급되었다. 장국밥과 냉면이 ‘2전5리’였다. 담배는 한 쌈지에 ‘1전5리’였다. 6전이면 점심을 먹고, 담배를 사고도 남는 ‘제법 쓸 만한 용돈’이었다.

이랬으니, 봉급과 용돈을 좀 아껴서 구두쇠 노릇을 하면 ‘학교생활’ 몇 년에 한 밑천을 장만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한 밑천까지는 못 되어도 ‘순사’의 봉급 정도는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좋은 학교를 학생들은 도포 입고, 갓 쓰고 통학했다. 어떤 학생들은 가마를 타고 등교하기도 했다. 그러면 하인이 책 보따리와 담뱃대를 들고 뒤를 따랐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학교를 싫어했다. 기숙사 생활이 거북하고, 학교의 규칙이 까다롭다는 불평들이 많았다. 그래서 학생들이 요청하면 수업시간을 단축해주기도 했다. 오늘날 학생들의 골칫거리인 ‘학점’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학교가 싫다고 도망치는 학생도 있었다. 박두성이라는 학생은 학교에서 도망쳤다가 몇 년이 지나서 돌아오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걱정스러운 나머지 신문에 ‘심인(尋人) 광고’를 냈다.


“글 닉기 슬허서 도망하야 아산 가셔 잇다가 부모를 차지랴고 지금 올나온 즉, 살든 동리도 알 수 업스니 이런 답답한 일이 어대 잇사오릿가.… 혹 아시난 이가 계시거든 혜민서 골 아무개의 집으로 지시하시면 백골난망이외다.”

떠돌이 장사꾼도 학교를 이용했다. 떠돌이들은 돈이 떨어지면 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주는 봉급으로 물건을 떼서 팔러 다녔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슬그머니 들어와서 잠을 자고 이튿날 다시 장사하러 나갔다는 것이다.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가 기자회견을 열고 ‘코로나19 대학가 재난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는 소식이다. 등록금의 ‘부분 환불’을 요구하고 있었다. 네트워크는 그 근거로 ‘온라인 강의’가 불만족스럽고, 코로나19로 개강이 연기되면서 기숙사 강제 퇴거, 불필요한 월세 내는 등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교육당국은 대학 총장 소관, 대학은 교육당국 지침 탓을 하며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코로나 탓’을 해야 더 맞을 것 같았다.


이정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slee@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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