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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고슴도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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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4월이라 맹하 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라는 구절이 있다. 입하 무렵, 가지마다 고봉밥처럼 푸짐하게 흰 꽃을 피워 달았던 이팝나무도 어느새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입하와 망종 사이에 들어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소만(小滿)도 지났으니 이제 여름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봄다운 봄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하고 지나왔다. 비록 한풀 꺾였다고는 하나 아직도 코로나는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이러다간 올여름에도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되면서 숲과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만큼 숲이 가까이 다가선 셈이다. 비 오는 날을 제외하면 봄이 다 지나가도록 거의 매일같이 숲길을 걸었다. 나무와 풀과 꽃,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모습을 연출하는 숲의 변화를 이토록 오래도록 지켜본 적도 없었다. 날마다 만나는 초록목숨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은 자칫 우울해지기 쉬운 나를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채워 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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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걸으며 만나는 자연은 어느 하나 반갑지 않은 게 없다. 숲에서도 가장 두려운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다. 둘레길을 걷다가 사람을 만나면 흠칫 놀라 나도 모르게 비켜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상대방도 역시 나를 경계하며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가거나 길을 벗어나 멀리 돌아서 가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딜레마가 생각난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란 추운 겨울, 서로의 온기를 위해 다가서면 바늘에 찔리고 떨어지면 얼어 죽을 지경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더 친밀해지고 싶었는데 상대방이 훅 다가오면 흠칫 물러서는 모순된 심리를 수시로 경험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걱정과는 달리, 실제의 고슴도치들은 시행착오 끝에 바늘이 없는 머리를 맞대어 서로 체온을 나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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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일상의 대화가 쉽지 않은 요즘 나는 독서와 산책을 통해 그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있다. 독서는 저자와의 대화이고 산책은 자연과 대화하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걷다 보면 나의 체력을 가늠해 볼 수 있고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다. 거리에 나가 사람을 만나는 대신 독서를 통해 저자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새로운 지식도 얻을 수 있고 일상의 대화와는 다른 정제된 생각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자연과 교감하고 숲의 변화를 관찰하는 숲길 산책은 자연의 일부인 나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 중에 반칠환 시인의 ‘노랑제비꽃’이란 시가 있다.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비단 노랑제비꽃만 그러한 게 아니다. 숲길을 걷다 보면 만나지는 모든 동·식물들. 가령 애기똥풀이나 찔레꽃무지, 초록색의 자벌레나 청설모, 쇠딱다구리와 무당벌레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아무리 하찮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숲이, 지구가, 우주를 필요로 한다. 역으로 말하면 그 모든 것이 있기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 파괴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숲이라는 자연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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