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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흐린 날의 천변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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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날이 흐리다. 창 너머로 보이는 도봉의 흰 이마가 구름에 반쯤 가려진 채 수묵화의 원경처럼 흐릿하다. 이런 날은 숲길을 걷는 것보다 물소리 명랑한 천변을 따라 걷는 편이 낫다. 녹음으로 한껏 짙어진 숲은 흐린 날이면 한낮에도 어둑하여 꽃을 만나기도 쉽지 않지만 천변을 걷다보면 바람도 시원하고 바람을 타는 꽃들의 춤사위도 볼만 하기 때문이다. 중랑천으로 이어지는 방학천을 따라 걸었다. 물소리를 따라 가는 산책로엔 조깅을 하는 사람들,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고, 이따금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빠르게 나를 앞질러 시야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다리 난간에 걸린 사피니아 꽃타래의 화려한 꽃빛에 홀려 이리저리 눈길을 주다 보니 작은 가게의 ‘수유화개’란 상호가 유독 눈길을 잡아끈다. 중국 송나라 때 시인 황산곡의 시에서 차용한 게 틀림없는 듯싶다. ‘수류화개(水流花開)’라니. 물 흐르고 꽃이 피어 있는 천변의 가게 이름으로 잘 어울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발목을 적실까 싶은 얕은 냇물엔 먹이를 찾는 백로와 물오리의 모습도 보이고 어느 틈엔가 천변엔 노란 달맞이꽃과 연보랏빛 쑥부쟁이들이 듬성듬성 피어 있다. 시절이 하수상해도 계절은 어김없이 오가고 그 사이사이로 꽃들은 때를 잊지 않고 피어나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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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휩싸인 도봉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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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천을 벗어나 중랑천에 이르니 사람도 훨씬 많고 산책로 주변엔 구청에서 가꾸어 놓은 다양한 꽃들이 피어 있어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접시꽃, 원추리, 패랭이꽃, 백합, 나리꽃, 메꽃, 분홍바늘꽃, 자귀나무꽃, 쑥부쟁이, 개망초까지 일일이 그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꽃들이 피어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란 노랫말도 있긴 하지만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것은 꽃이 아닐까 싶다.

중랑천변을 걸을 때면 꼭 둘러보는 곳이 있다. 다름 아닌 구청에서 특별히 조성해 놓은 쥐방울덩굴 군락지다. 지날 때마다 챙겨 살펴보곤 하는데 이번에 들러보니 마침 쥐방울덩굴 꽃이 피었다. 꽃 모양이 색소폰을 닮은 등칡꽃과 흡사한데 크기가 훨씬 작다. 쥐방울덩굴은 쥐방울덩굴과의 어려해살이 덩굴식물로 7~8월에 잎겨드랑이에서 여러 개의 연녹색의 꽃이 핀다. 중랑천변에 쥐방울덩굴 군락지를 조성한 까닭은 쥐방울덩굴이 꼬리명주나비의 서식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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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명주나비

호랑나비과에 속하는 꼬리명주나비는 날개 뒤쪽에 도드라진 꼬리 모양의 돌기와 명주실 빛깔의 화려한 날개 색을 지닌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이다. 산업화 이전에는 서울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도와 전라남도 진도 등에 국지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중랑천변의 한 도로 공사장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환경운동가와 구청의 많은 노력으로 꼬리명주나비 애벌레의 먹이가 되는 쥐방울덩굴 서식지 군락을 조성하여 꼬리명주나비 서식지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꽃이 핀 쥐방울덩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꼬리명주나비의 애벌레나 애벌레에게 갉아 먹힌 흔적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나의 눈이 어두운 탓이길 바라며 꼬리명주나비의 화려한 춤사위를 빨리 만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흔히 우리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를 추겨 세우기도 하지만 인간만이 살아갈 수 있는 생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분별한 개발로 생 태계가 파괴되어 토종식물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식물과 더불어 공생을 꿈꾸던 곤충들도 함께 사라져 가고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지향해야만 하는 이유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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