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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양평 물소리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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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숲 친구들과 양평 물소리길을 걸었다. ‘물소리길’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품고 있는 물의 고장 양평에서 조성한 물길 따라 걷기 좋은 길이다. 전철 경의중앙선의 역과 역을 걷고, 다시 마을로 들어가 골목과 숲을 걸을 수 있다. 도시의 콘크리트 빌딩 숲에서 답답하던 일상에서 벗어나 북한강에서 남한강으로, 다시 흑천(黑川)으로 이어지는 물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다 보면 절로 행복해진다. 양수역에서 용문역까지 총 60여㎞에 이르는 물소리길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도록 총 6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3코스인 아신역에서 양평역에 이르는 11.3㎞의 ‘강변 이야기길’을 걸었다.


이른 아침 전철을 타고 약속장소인 아신역을 향해가며 창 너머로 가을이 내려앉는 강변 풍경을 감상하려니 일상의 소음들이 물결에 씻기어 아득히 멀어진다. ‘여행은 일상의 부재’라는 작가 김영하의 말이 새삼 가슴에 내려앉는다. 열차는 어느새 두물머리를 지나고 있다. 사진촬영의 명소로 잘 알려진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남북이란 꼬리표를 떼고 한 물결을 이루어 한강으로 거듭나는 곳이다. 물안개와 나루터, 수많은 수양버들 등 강가 마을로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두물머리지만 이곳이 원래는 나루터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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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팔당댐으로 물길이 막혔지만 댐이 생기기 전에는 강원도와 충청도, 서울 뚝섬과 마포나루를 이어주던 마지막 정착지로써 수많은 배가 오가던 나루터이자 만남과 이별의 처소이기도 했다. 새벽안개 피어나는 강 언덕에 아슴아슴 흔들리던 안개꽃과 저녁 어스름 속에 흔들리던 때 지난 갈대들의 서걱거림. 사랑의 신호처럼 아득하게 다가오던 운길산 수종사의 불빛 한 점, 모닥불 아래 추억을 굽던 카페와 그 카페의 바람벽에 무수히 적혀 있는, 이제는 남남으로 살아갈 지도 모를 수많은 연인들의 이름과 사랑의 맹세들… 흐르다 잠시 숨을 고르는 두물머리에 오면 슬픔마저도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신발 끈을 동여매고 걷다 보니 보랏빛 개미취와 노란 산국, 그리고 흰 억새꽃이 산들바람을 타며 풀어놓는 가을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작은 마을을 지나 산길로 접어드니 벌어진 밤송이에선 아람이 쏟아지고, 길 위엔 도토리들이 누군가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처럼 흩어져 있다. 산길을 걷는 중에 누군가의 입에서 ‘황순원의 소나기 마을’ 이야기가 나왔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만났던 황순원의 소나기는 나를 포함한 또래의 사내 녀석들에게 생애 최초의 격한 감정을 가르쳐준 소설이었다. 평안남도가 고향인 황순원의 문학관이 양평에 들어서게 된 것은 소설 ‘소나기’ 속에 나오는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는 짧은 한 문장이었다. 물소리길을 따라 걸으며 저마다 풀어놓는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에 어느새 가을해는 뉘엿뉘엿 기울었다. “조약돌을 닦는 것은 고요한 물이 아니라 여울져 흐르는 거센 물살이다."라는 말처럼 나를 닦아낸 물결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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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섶에 저녁햇살을 받은 붉나무 잎이 유난히 붉었다. 인간의 삶이란 것도 대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춘하추동의 계절처럼 그렇게 봄여름가을 겨울이 순환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바뀌는 때를 따라서 새롭게 바꾸어 가야한다는 수시변역(隋時變易)이야말로 영구불변의 법칙이란 걸 모르지는 않으나 물소리 빨라지는 가을이 되면 마음도 덩달아 조바심 하며 희미해진 기억을 자꾸 더듬게 된다. 귀로의 열차 안에서 읽은 시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 …양수리 강가/ 때 지난 갈대들 / 저녁노을 소슬한 바람에/ 성긴 머릿발 날리며 몸 흔들고 있는 /섭섭함도 이제는/ 가슴 아릿아릿 정신이 아득하도록 아름다워라// 강 건너 산마루 위/

짙은 어둠 속/ 水鐘寺 한 점 불빛/ 은밀한 사랑의 신호인가/ 남몰래 갈대에 불붙이고 있는/

어두운 바람의 손 엿보는 / 섭섭함도 이제는 /핏줄 저릿저릿 눈앞이 어지럽도록 아름다워라‘

-김여정의 ‘섭섭한 것도 아름다워라’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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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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