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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단풍본색(丹楓本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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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이다. 설악에서 처음 물들기 시작한 단풍은 하루에 200m씩 고도를 낮추며 산에서 내려온다는데 순식간에 천지간이 단풍 물결을 이룬 것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느티나무는 물든 이파리들을 색종이처럼 뿌려댄다. 가로변의 은행나무들은 금빛으로 물들어 눈부시고 단풍나무들은 꽃보다 붉은 빛을 자랑하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냥 집 안에 머물기엔 창 너머로 보이는 도봉산의 암봉 주위로 붉게 타는 단풍의 유혹이 강렬하다. 끝내 그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배낭을 꾸려 산을 올랐다.


바람에 쓸리는 느티나무 낙엽을 밟으며 산을 향해 걷는데 산길 들머리에 진홍으로 물든 화살나무 잎이 햇살을 받아 꽃처럼 고왔다. 어느새 노랗게 물든 계수나무 잎에선 달달한 달고나 향이 나고 단풍나무뿐만 아니라 벚나무, 오리나무, 상수리나무, 담쟁이 잎까지 초록 일색이던 나무들이 색색으로 물들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일찍이 법륜 스님은 ‘잘 물든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지만 단풍은 단풍대로, 꽃은 꽃대로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 스님의 말씀엔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노년의 원숙미를 강조한 속뜻이 들어 있음을 알기에 굳이 그 말씀에 딴죽을 걸 까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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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물든 단풍을 바라볼 때면 미당 서정주의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하는 ‘푸르른 날’이란 시의 한 구절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지만 실제로 단풍이 드는 이유는 나뭇잎에 들어 있는 색소 때문이다. 나뭇잎에는 녹색의 엽록소 외에도 주황색을 띠는 카로틴과 노란색의 크산토필 등의 색소가 들어 있는데 일조량이 풍부해서 광합성이 활발할 여름철에는 엽록소가 꾸준히 생성되기 때문에 다른 색소들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되면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로 잎을 떨어뜨리기 위해 나뭇잎은 잎자루와 가지 사이에 ‘떨켜’라는 세포층을 만들어 양분과 수분이 잎으로 가지 않도록 차단한다. 기온이 5℃ 이하로 내려가면 녹색을 띠는 클로로필이 분해되면서 잎 안에 있는 엽록소가 파괴된다. 그동안 녹색에 가려져 있던 노란색 계열의 카로티노이드 성분이 제 빛깔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생강나무나 비목나무 등이 노란색으로 물드는 이유다.

그런가 하면 일부 나무의 경우엔 붉은색을 띄기도 하는데 잎자루 분분에 생긴 ‘떨켜’로 인해 줄기로 이동하지 못하고 잎에 쌓인 당 성분이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를 새롭게 합성하여 발색을 하기 때문이다. 단풍나무, 화살나무, 담쟁이덩굴 등의 화려한 단풍을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안토시아닌 덕분이다. 나무들이 울긋불긋 물드는 것도 저마다 지닌 색소의 함량이 다르고 기온의 변화 같은 외부 환경 조건이 다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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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교차가 클수록 붉은 색을 띠는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가 많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일교차가 크고 청명한 날씨가 이어져야 고운 단풍을 볼 수 있다. 일교차가 크더라도 영하로 내려가선 안 된다. 온도가 서서히 내려가면서 햇빛이 좋아야 하고 너무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면 단풍이 들기 전에 잎이 마르기 때문에 적당한 습도가 유지되어야 한다. 나뭇잎 하나 단풍 드는 데에도 이렇게 많은 조건이 필요하단 생각을 하면 낙엽 한 장도 무심히 밟고 지날 수가 없다.

단풍을 제대로 즐기려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너무 가까이 가면 상처가 보이고 너무 멀면 그 고운 빛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처가 나면 상처가 난 대로, 벌레 먹은 잎은 벌레 먹은 대로 아름답다. 산에 올라 때맞춰 본색을 드러내는 나무들의 화려한 축제를 보며 늘 때를 놓치며 살았던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나도 한 번 쯤은 저 나무들처럼 화려하게 타오를 수 있을까 생각한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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