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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용문산 은행나무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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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마침내 그 나무 아래 도착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며 시 한 편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반칠환 시인의 시 ‘새해 첫날’이었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뜬금없이 그 시가 생각난 것은 그 나무 한 그루 보려고 용문역에서 용문사까지 발바닥 아프게 걸어온 나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저마다 지닌 재주로 날고, 뛰고, 걷고, 기고, 굴러도 한날한시에 새해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누리에 고르게 내리쬐는 햇빛처럼.


높이 42m, 둘레 14m의 용문사 은행나무는 수령이 1100년을 훌쩍 넘어선다. 우리나라에서는 1500년 된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 다음으로 오래 산 은행나무다. 열매가 열리는 암나무로는 동남아에서 최고의 수령을 자랑한다고 한다. 그 긴 세월 동안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1100번 넘게 새해를 맞이했을 은행나무 앞에 서니 겨우 서너 시간 걸어왔다고 힘들다고 엄살을 피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용문역에 내려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황금빛으로 물든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기를 은근히 바랐으나 이미 잎은 남김없이 지고 몇 개의 은행알만 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용문사 은행나무는 100년 남짓 사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위엄과 푸른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어 나목이라도 위풍당당하기만 하다. 절에 부처가 아닌 나무를 보러 간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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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은행나무 길을 걷던 날은 미세먼지로 하늘이 흐렸다. 가을엔 맑은 날이 제법 많았는데 올겨울에는 미세먼지가 심상치 않을 거란 전망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주춤했던 중국의 산업 활동이 정상화되면서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우리는 갈대와 억새가 바람을 타는 흑천을 따라 걷기도 하고 그윽한 산국 향기와 단풍이 곱게 물든 산길을 걸으며 숲의 장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장점이 많은 숲. 그 중에도 우리 주변의 나무와 숲은 미세먼지를 차단하고 저감하는 효과가 탁월하다. 나무 한 그루가 연간 3.75g의 미세먼지를 줄여준다는 사실은 놀랍기까지 하다. 무려 에스프레소 한 잔 분량이다. 나무와 숲이 미세먼지를 저감하는 과정은 크게 차단-흡착-흡수-침강 4단계로 나뉘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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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타고 미세먼지가 숲의 우듬지에 다다르면 울창한 숲은 자연스럽게 미세먼지의 이동 속도를 늦추고 면적을 줄이면서 1차적으로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각각의 나뭇잎들은 미세하고 복잡한 표면을 지니고 있어 미세먼지가 한번 달라붙으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잎의 수많은 기공은 식물 내부로 미세먼지를 흡수해버린다. 이처럼 미세먼지들은 숲을 통과하면서 나뭇잎에 흡착·흡수되거나 숲 내부의 국지적 기상 현상인 미기상(지면에 접한 대기층의 기후) 조건에 의해 지표면으로 가라앉는다. 그냥 바라만 봐도 좋은 숲이지만 예전에 알지 못했던 숲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자연은 아름답다. 두 다리가 성한 이상 나는 또 걸을 것이다. 때로는 나무를 만나기 위해, 때로는 숲을 찾아 걸으며 새로운 풍경들을 만날 것이다. 절집보다 유명한 용문사 은행나무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해마다 새잎을 피우고 열매를 내어달듯이 나는 두 다리가 성한 이상 걷고 또 걸으며 자연을 오감으로 오롯이 느낄 것이다. 꽃을 보고도 기뻐할 줄 모르고, 숲속을 걸으면서도 맑은 생각을 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슬픈 인생인가.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