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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모과 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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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겨울비 지나간 뒤 나무들이 단출해졌다. 황금빛으로 물든 이파리를 자랑하던 은행나무도, 울긋불긋 물든 이파리를 무시로 뿌려대던 벚나무도 모든 잎을 내려놓고 한결같이 묵언수행 하는 수도자처럼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많던 이파리들을 남김없이 떨쳐내고 묵상에 잠긴 듯한 나무들을 보면 사소한 것에도 좀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우유부단함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득 “겨울비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으니 더욱 가난해지고 싶다. 온갖 소유의 얽힘에서 벗어나 내 본래의 모습을 통째로 드러내고 싶다.”고 한 법정스님의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비에 젖은 낙엽들이 함부로 뒹구는 골목을 돌아 나오다가 이파리 하나 없는 가지 끝에 노랗게 익은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를 보았다. 어른 주먹만 한 커다란 열매는 다름 아닌 모과다. 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남겨둔 홍시를 달고 있는 감나무는 종종 보았어도 이렇게 많은 열매를 달고 있는 모과나무를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무들이 가장 늦게까지 달고 있는 것은 잎이 아닌 열매다. 마지막까지 가장 소중한 것을 놓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나 나무나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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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달리는 참외라는 뜻의 모과(木瓜)는 이름처럼 얼핏 보면 참외를 많이 닮았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울퉁불퉁하기는 해도 생김새가 그리 망신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과일전의 천덕꾸러기쯤으로 여겨지던 모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양만 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흔히 모과를 보면 세 번 놀란다고 한다. 처음엔 그 못생긴 외양에 놀라고, 다음엔 그 향기에 놀라고, 달콤한 향기에 덥석 베어 물었다가 그 떫은맛에 마지막으로 놀란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눈부신 봄볕 아래 피어나는 연분홍의 모과 꽃을 만날 때가 아닌가 싶다. 갓 피어난 연둣빛 이파리와 어울려 수줍게 피어난 연분홍의 어여쁜 모과 꽃을 보면 절로 탄성이 터질 수밖에 없다. 모과나무가 장미과에 속하는 나무이고 보니 꽃의 아름다움에 대해선 굳이 부연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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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가을, 충북 제천의 청풍호반에서 음악회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가을호반의 정취를 한껏 살리기 위해 음악회 중간에 악양에 사는 박남준 시인을 초대해 시낭송을 했다. 시낭송이 이어질 때마다 금수산의 오색단풍이 파르르 떨리고 노을에 물든 청풍호에 잔물결이 일었다. 시낭송 다음 날, 새벽 산책길에서 주었다며 박 시인이 큼지막한 모과 한 알을 건네주었다. 반은 노랗고 반은 푸른 모과였다. 나는 그 모과를 받아 승용차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이내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차를 탈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 향기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모과였다. 세차를 하기 위해 차 안을 정리하다가 뒷좌석 바닥에 뒹굴고 있는 모과를 보았다. 어느새 푸른빛이 사라지고 온통 노랗게 익은 모과는 이미 한 귀퉁이가 시커멓게 썩어가고 있었다. 달콤한 향기는 그 썩은 상처에서 나는 듯했다. 썩어가면서도 향기를 풀어놓는 모과를 보며 사람들도 모과처럼 나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과나 사람이나 겉모습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그 존재에 대한 무례이자 본질을 보지 못하는 스스로의 우매함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모과 한 알이 익기까지에는 봄날의 햇빛과 바람, 비바람 몰아치던 천둥 번개의 날들이 들어 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못생겼다고 함부로 말하는 우를 범하는 일은 없을 터.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라는 노랫말이 있다. 나도 모과처럼 향기롭게 익어가고 싶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사진없는 기자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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