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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박소란 ‘다음에’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연애 편지’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연애는 당신을 향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관심이 있어야 관찰이 생긴다. 관찰하는 순간에 관계가 맺어진다. 다시, 관계는 우리를 인연으로 묶어 서로를 관리하도록 부추긴다. 이렇듯 관심·관찰·관계·관리의 ‘4관’이 연애 인문학의 기본이다

이진우 기자

기사입력 : 2021-02-26 07:00

다음에 /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

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

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center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연애 편지’, 18세기,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앞의 시는 행간이 넘치어, 연애편지로 자칫 길어지는 위험을 애써 절제하려는 듯 화자의 호흡조절에 신중하다. 넘치면 독이다. 또 모자라도 약으로 정제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담백함은 지나치지 않고 순진함이 모자라지도 않다. 이 덕분에 독자에게 균형감을 야기한다. 그래서 ‘다음’은 한자로 ‘多音(다양한 목소리)’이 되어서 독자에게 선물한다. 혹은 ‘多陰(수많은 휴식처)’으로 읽혀지는 독자를 초대한다.

시를 처음 보면 연애엔 맹탕, 서툰 하수의 냄새가 훅 풍기며 들어온다. 하지만 자꾸만 반복해서 읽으면, 연애 고수의 얼굴 표정을 한 화자가 어쩐지 민낯을 보이면서 연애편지는 지워지고 시로 변환한다. 여기에 좋은 시인의 가능성과 힘이 드러난다. 그래서 박소란(朴笑蘭, 1981~ )의 시는 일회용 커피가 아닌 자연산 녹차로 음미하길 충동한다. 녹차를 마시듯이 독자라면 반복해 우려내야 한다. 실은 처음엔 시가 좀 싱겁다. 하지만 나중엔 맛있어 지는 시로 다가오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

연애의 하수는 항상 관심과 관찰, 이 사이에서 주변을 맴돌고 오간다. 하지만 연애의 고수는 다르다. 관계와 관리, 이 영역을 확장하고 기억하려 애쓴다. 시에서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는 나와 당신과의 관계와 관리를 전적으로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단지 비움의 상태로 내면의 ‘나’를 정지시키고자 노력하는 스스로의 꺾음(曲)이고 굽힘(枉)이다.

“꺾으면 온전해지고, 굽히면 곧아지며, 비면 차고, 낡으면 새로워지며, 적게 하면 얻고, 많게 하면 미혹된다(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弊則新, 少則得, 多則惑).”

노자 도덕경 22장의 말처럼 ‘다음’이란 깊이 파인 ‘웅덩이’가 되어 시간이 오길 애써 기다림을 의미함이다. 요컨대 마음에 기대와 희망 따위를 일체 담아내지 않는 마음 비움이다. 이 비움은 언제든지 때가 오면 채움을 맞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기약을 모르는 연애 관계의 처방은 오로지 다음이라는 말-곡(曲)·왕(枉)·와(窪)·폐(弊)-들에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多音’의 제 목소리를 내서 ‘多陰’의 휴식처를 기필코 내가 만들어 놓아야 한다. 휴식처는 약속을 적게(少) 하는 것에 공간의 얻음(得)이 있다. 약속을 남발(多)하면 길의 시간을 놓치거나 잃어버린다(惑).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란 시공간을 내가 만들 수만 있다면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에서 김이 빠지고 맥이 풀릴 일이 전혀 없다.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내게서 생겨나서 “나를 데리고 가”는 다음(次時)의 세계가 우주가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다음에 밥 한 번 먹어요?”

여자의 이 말이 택시를 타고 가버린 당신이란 남자에게 닿기란 새로운 연애 상대가 곁에 있을 때 비로소 빈 말이 된다. 막 내뱉은 내 말이지만 이미 녹이 들어 낡은 말과 같아진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제자이자 임진왜란 의병장이었던 내암(萊庵)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은 조선의 선비로는 비교적 장수를 누렸던 인물이다. 그의 장수비결을 엿볼 수 있는 한시(漢詩) 한 수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소개하자면 이렇다. 참고로 한시 제목은 ‘왜송(矮松)’인데 그 뜻은 ‘작은 소나무’로 풀이된다.

짧디짧은 외로운 소나무가 탑 서쪽에 서 있으니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 나란하지 않네

지금 외로운 소나무가 짧다고 말하지 마소

소나무가 자란 다음날이면 탑이 오히려 짧으리

短短孤松在西塔 (단단고송재서탑)

塔高松下不相齊 (탑고송하불상제)

莫言今日孤松短 (막언금일고송단)

松長他時塔反低 (송장타시탑반저)


한시를 나는 나무 인문학자 강판권 교수가 쓴 명저 <숲과 상상력>(문학동네, 2018년)에서 처음 보았다. 한시에 등장하는 ‘타시(他時)’라는 말에 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박소란의 시「다음에」를 마음속 서랍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한시와 현대시가 서로 맥락이 통한다. 그렇다. ‘작은 소나무’가 다음에는 높았던 ‘탑’ 보다도 더 높아질 수 있다.

이처럼 연애의 주도권은 남자에게서 여자에게로, 반대로 여자에게서 남자에게로 바통이 넘어가는 것이 세상사 불변하는 삶의 이치이다. 그러니 어쩌랴. 좋은 남자, 예쁜 여자를 태운 택시가 떠났다고 아주 끝난 것이 아니다. 실망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다. 다음에, 버스를 타고 ‘그’가 곧 내릴 수도 있고, 자가용을 몰고 와 밥 먹자고 나한테 ‘당신’이 먼저 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이란, 연애 인문학

여기 젊은 날의 그녀가 있다. 화양연화의 미인은 화가의 모델이 되어서 우리에게 그때 그 시절이 과거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심지어는 연애의 겉과 속인 그 달콤함과 공허함까지 풍자하며 보여준다.

프랑스의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의 <연애편지>가 그것이다. 이 작품에 세계적인 미술평론가 오시안 워드는 <혼자 보는 미술관>(알에이치코리아, 2019년)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는 남녀관계에 대한 달콤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프랑스 로코코 시대의 취향에 맞춰 그림을 그렸다. <연애 편지(The Love Letter)> 같은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이성의 방을 몰래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이 여성은 애인에게 보내려던 비밀 편지를 들고 요염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파스텔 색감이나 꽃다발, 레이스 달린 의상 때문에 달콤하고 관능적인 느낌,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이다. 이리로 오라는 듯한 여성의 눈길이나 앞으로 기울인 자세에서 우리도 그 일에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느껴지는 것 같다. 비난하듯 빤히 바라보는 충직한 개의 시선만이 이 연속극 같은 일에 빠져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프라고나르의 작품은 가벼우면서도 낭만적이고 즐거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안에는 관능적인 연애소설같이 요란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책, 216쪽 참조)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림 속 여성이 쓰다 만 편지를 오른 손엔 움켜쥐고 왼손은 꽃다발을 안으면서 누군가에게 묻는 시선을 화면 바깥으로 보내고 있다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서 곧 쓰다 만 편지는 화장대에 던지면서 다음으로 기약을 연기하고, 꽃을 준 남자를 만나고자 곧장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레이스 치마 속 엉덩이를 올릴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 여성은 연애의 고수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잘 모르는. 머릿속은 든 게 없는 백지와 같고, 얼굴만 예쁘장한 그렇고 그런 흔한 미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착각이 들었다.

꽃과 같이 붉은 핑크빛의 얼굴은 크게 낙심하거나 허탈해 짓는 그런 실망한 표정이 아니다. 무연(憮然)하다, 라고 단정을 짓기가 어렵다. 오히려 두 남자를 동시에 상대하려는 자신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운 눈빛을 무심코 은연중에 발산한다고 말할까. 어쨌든 밀당의 고수이고 연애에 있어서는 프로 수준급일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가. 그림을 한참 보노라면 질리고 식상한 인상이 스멀스멀 더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연애 편지>는 다음이 아니라 ‘지금’에 충실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소란의 시와 그림은 품격이 맞지 않는다. 오히려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여인>이란 작품이 어울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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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여인’, 17세기, 캔버스에 유채, 독일 드레스덴 고전 거장 회화관.


이 그림에 오시안 워드의 설명은 이렇다. 다음이 그것이다.

그림의 중앙에 똑바로 서서 편지를 움켜잡고 있는 여성, 특히 그의 표정은 극적인 순간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Jan Vermeer, 1632~1675)가 자주 되풀이해서 그렸던 장면이다. 그 여성은 팔꿈치를 옆구리에 단단히 붙이고 긴장한 채 양손으로 편지를 들고 열심히 읽고 있다. 아마도 멀리 있는 연인(열린 창문은 감옥 같은 집에서 도망치고 싶은 여성의 간절한 바람을 보여준다)이 기다리던 소식을 보내온 것 같다. 우리가 모두 이 그림과 관계를 맺게 되는 순간이다. (같은 책, 25쪽 참조)

그렇다. 이 그림은 ‘지금’이 아니라 ‘다음에’라는 관계로 발전하며 이어진다. 이 그림의 힘이다. 박소란의 시의 화자처럼 우리로 하여금 공감하면서 같이 아픔은 느끼되 속내를 비우는 것으로써 채워지는 그런 희망의 인문학을 연출한다. 관심/관찰, 에 머물지 않고 관계/관리, 로 웅덩이를 파서 ‘나’를 다음에, 장소와 시간으로 이끌어 기다리게 하는 마음 치유에 가닿는다. 나는 그렇게 보고, 또 그렇게 시와 그림을 감상했고 느꼈다.

연애의 단절, 그 절망적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게 무연히 다가서려 함은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지는 것으로 여자인 나의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는 당신이란 남자에 대해서 “당신이 말할 때”조차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하게 반응할 수 있는 텅 빈 결과를 낳게 한다. 다시 말해서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와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계/관리의 외연 확장인 셈이다.

다음에, 라고 말한 당신?

나와 지금은 ‘모르는 사이!’


박소란은 첫 번째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년) 을 내놓고, 4년 뒤 두 번째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창비, 2019년)을 펴낸 바 있다. 다행이 두 권의 시집을 모두 나는 갖고 있다. <한 사람의 닫힌 문>에 이런 시가 보인다. ‘모르는 사이’가 그것이다.

모르는 사이 / 박소란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

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

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은평병원을 지

났습니다 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

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 적이 있지

요 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돌아선 적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

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당신은 벨을 누르고 버스는 곧 멈

출 테지요

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오늘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이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휘휘한 공기에 대해 당신

무릎 위 귀퉁이가 해진 서류가방과 손끝에 묻은 검뿌연 볼

펜 자국에 대해

당신은 이어폰을 재차 만집니다

어떤 노래를 듣고 있습니까 당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그 노래를 나도 좋아합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이 열립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당신이 유유히 문을

나섭니다 당신의 구부정한 등이 저녁의 미지 속으로 쓸려

갑니다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center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음악 수업’, 17세기, 캔버스에 유채, 독일 드레스덴 고전 거장 회화관.


이 시의 전문을 페이메이르의 <음악 수업>과 같이 책상에 펼쳐 놓고 “내 이름은 상훈입니다”라고 쓰고 당신을 찾아서 7019번 버스에 탑승하는 욕구가 별빛처럼 반짝이는 상상이 일어났다. 밤의 허기가 불쑥 찾아와 내 사랑은 어디에, 노랫말처럼 무시로 슬퍼지고 그냥 헛헛했다. 연애의 시간들이 내게서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연애는 당신을 향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관심이 있어야 관찰이 생긴다. 관찰하는 순간에 관계가 맺어진다. 다시 관계는 우리를 인연으로 묶어 서로를 관리하도록 부추긴다. 이렇듯 관심·관찰·관계·관리의 ‘4관’이 연애 인문학의 기본이다.

박소란의 시는 첫 번째 시집에서 택시 탄 당신을 버리고 광장과 버스에서 당신을 관찰하면서 관계를 맺으려 궁리하는 모습이다. 마치 페르메이르의 <음악 수업>이란 그림을 눈앞에 두고 시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음악 수업>이란 그림을 미술사학자 이진숙은 이렇게 해설했다.

<음악 수업(De muziekles)> 속 여자는 피아노의 전신인 하프시코드 앞에 서 있고, 옆의 남자는 지휘봉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제목대로 ‘음악 수업’을 하는 중인 것 같다. 둘 사이의 어떤 대화가 이뤄지는지는 짐작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낮은 톤의 소리가 지배하는 공간. 비밀스럽고 떠들썩하지 않은 사랑의 분위기에 그림 전체가 신비롭게 젖어 있다. 사랑이 시작되는 첫 순간일까? 남자는 살짝 입을 벌리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뒷모습만 보이는 여자의 속마음은 어떨까?

그녀가 숨기고 싶은 속마음을 살짝 보여주는 장치가 있다. 바로 하프시코드 위에 달린 거울이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시선은 남자를 향하고 있다. 그녀의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실제 각도보다 더 의도적으로 남자를 향하도록 그려졌다. 이 사랑은 어떻게 결론이 날까? (이진숙 <인간다움의 순간들-흔들리는 삶이 그림이 될 때>, 319쪽 참조)

당신이란 내 사랑은 알고 보면 항상 가까운 옆 자리에서 관심의 싹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옆’이 관찰이 되고 ‘곁’을 허락해주는 시간이 연애의 적기, 즉 타이밍이다. 과연 그림 속 여자는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것 같다. 아직 ‘옆’에만 있지, ‘곁’을 내주지 않는 당신이란 남자가 야속할 것이다. 스승과 제자, 그들이 남녀가 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맺어질 수 없다. 요원하다. 그보다는 박소란의 시의 화자는 가능성이 있어서 다행이다. 또 7019번 버스를 저녁에 타다 보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제발, 속내로 말하지만 말고 고백하자. 왜냐고? 연애라는 사랑의 실체는 ‘한다’라는 행동에서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수줍은 마음만을 오래 간직함은 그저 짝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어서 용기를 내시라. 혼자 있는 방구석에 나와 버스이든 지하철이든, 무슨 수업이든 이성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당신을 찾아 내 곁에 둘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당신에게 내가 먼저 고백한다면 다음에, 라거나 혹은 다음에 밥이나 먹자, 이런 식으로 응답이 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다. ‘남’이지 ‘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백하면 ‘모르는 사이’가 ‘아는 사이’가 되어서 ‘연인 관계’로 다음엔 왜? 발전을 하지 않았던가. 박소란의 시와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 ‘나’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다정하게 성찰해 볼 일이다. 다가오는 삼월에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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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박소란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2015.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

오시안 워드, 이선주 옮김 <혼자 보는 미술관>, 알에이치코리아, 2019.

강판권 <숲과 상상력>, 문학동네, 2018.

이진숙 <인간다움의 순간들-흔들리는 삶이 그림이 될때>, 돌베게, 2020.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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