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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우리는 모두 자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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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휴일 아침,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었을 때 도봉산 자운봉이 말끔히 세수한 얼굴로 창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며칠을 두고 비 뿌리고 바람 사납더니 모처럼 쾌청한 하늘을 배경으로 산빛이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서둘러 배낭을 꾸려 산을 향한 것도 5월의 숲의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초록이 짙어져 녹음을 드리운 나무가 있는가 하면, 이제 막 연둣빛 잎사귀를 내밀기 시작하거나 붉은 기운이 도는 연초록 나무 등이 어울려 눈부신 조화를 이루며 숲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설레게 만든다. 등산로 입구는 이미 인파들로 북적였다. 5월의 숲만큼이나 색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등산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생기가 넘치는 초록빛 일렁이는 숲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하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저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의 세세한 표정은 읽을 수 없지만, 숲을 향해 걷는 사람들의 대화는 한껏 유쾌하고 발걸음은 하나같이 가볍기만 하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다투어 숲을 찾는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아마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사태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감에 시달리던 심신을 자연의 품속에서 치유하고 위로받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제가 살던 굴을 향해 돌린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도 있듯이 자연에서 태어났으니 힘들 때 자연을 찾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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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볼 일이 있어 고향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읍내에서 오지 않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다가 그냥 걸어서 고향집까지 갔다. 초등학교에 다닐 땐 날마다 걸어 다니던 십리 남짓한 길인데 차를 타고 다니느라 몇십 년 동안 걸어본 적이 없었다. 옛 추억을 반추하며 걷기엔 더없이 좋은 거리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 유년의 오솔길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먼지가 뽀얗게 일던 신작로엔 아스팔트가 깔리고 넓게 뚫린 도로 양옆으론 신축 건물들이 들어섰다. 초등학교 시절, 문둥이가 진달래꽃을 꺾으러 온 어린아이를 잡아간다는 고갯마루는 흔적도 없고, 그 고갯마루를 달음박질로 넘어 가쁜 숨 몰아쉬며 마른 목을 축이던 뽕밭 옆 옹달샘도 사라져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걷는 동안 나는 조금씩 달뜨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느새 머리엔 무서리 내려앉고 눈가엔 다락논 논두렁처럼 주름이 깊어졌음에도 걸으면 걸을수록 나의 걸음걸이는 아이를 닮아가고 눈빛 또한 맑아져서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다. 청보리밭을 지날 땐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처럼 종달새 둥지를 찾아 보리밭을 들어가고픈 충동이 일어 가까스로 참아야만 했다. 마침내 길이 끊어지고 길을 막아선 비닐하우스를 에둘러 잡목 우거진 잔솔밭을 겨우 벗어났을 때 저만치 보이던 고향 집의 풍경은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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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즐겨보는 TV프로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가 있다. 사람의 거리를 떠나 산중 오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도회지에 사는 동안 사람에게 받았던 상처를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며 치유 받는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과 독선이 자연을 파괴하며 문명을 발전시켜왔지만,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체에는 자연치유력이란 자연이 준 선물이 있다고 한다. TV 속 ‘자연인’들이 하나같이 숲속에서 몸의 건강을 회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듯 우리가 자연과 동화되어 친구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또한 지금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틈이 날 때마다 숲을 찾아가는 우리는 모두 자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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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카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