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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이근화 ‘아이 라이크 쇼팽’과 제임스 티소 ‘휴일’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이근화의 시를 읽으면서 문득 나는 최영미의 시가 겹쳐졌다. 최영미는 서른이 이미 다 지났는데 나와 잔치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하고 울부짖었다면, 이근화는 “오래 서서 울게 될 여자 신호등이 될 저 여자”로 거리를 두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꽃인 ‘나’가 빠진 잔치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꽃을 지우고 ‘나’를 놓으면 내가 가야할 방향으로 신호등은 적색이 됐든, 청색이 됐든 간에 켜지게 마련이다. 한결 건너기가 수월해질 테다.

이진우 기자

기사입력 : 2021-06-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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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라이크 쇼팽 / 이근화

시장 바구니에 커피 봉다리를 집어넣은 여자

빈 병에 커피를 채우고 커피물을 끓이는 여자

커피물이 끓을 동안 손톱을 깎는 여자

쇼팽을 들으면서 발톱마저 깍는 여자

커피물을 바닥내고 다시 물을 올리는 여자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물을 두 번 끓이는 여자

커피를 마시지 않는 저 여자

손톱을 깎으며 눈물을 보였던 여자

커피 한 봉다리로 장을 본 여자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던 여자

횡단보도 앞에 서서 오래 울었던 그 여자

빨리 건너지 않으면 더 오래 울게 될 거야

아직 건너지는 마 좀 더 울어야 되지 않겠어?

커피 봉다리를 들고 오래 울고 있었던 여자

이제 커피는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는 여자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여자

오래 서서 울게 될 여자 신호등이 될 저 여자


손톱 발톱이 마구 자랄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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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 ‘휴일’,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영국 런던 데이트갤러리.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 남자의 사랑은 한 여자가 있어, 남은 생애를 차지했고 폭풍우처럼 말년을 휩쓸었다. 오직! 그녀 뿐. 명화(名畵) ‘휴일’을 그린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1902)와 그의 아내 캐슬린 뉴턴(Kathleen Newton, 1854~1582)의 연애담은 그래서 잔에 담긴 커피처럼 뜨거웠다. 독자로 하여금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물을 두 번 끓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휴일을 가지라고 초대한다. 또한 중국사에 등장하는 당(唐) 현종과 양귀비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悲戀)를 듣고 훗날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서사시 <장한가(長恨歌)>를 단숨에 지었다는 전설을 불현듯 상기시킨다. 또 있다. 그림과 시의 세상이 아닌 음악 세상에서다. 제자인 브람스는 스승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너무 사모한 나머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지. 그런가 하면, 뮤즈 캐슬린처럼 자살을 선택한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 울프의 여생이란 또 어떻고.

서른,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시인 이근화(李謹華, 1976~ )의 시집을 두 권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시인이 서른 즈음에 민음사에 펴낸 첫 시집 <칸트의 동물원>이고, 나머지는 창비에서 나온 네 번째 시집인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가 그것이다. 앞의 ‘아이 라이크 쇼팽’이란 시는, 첫 시집 중간에 보인다.

아무튼 시인 근화 씨. 시인은 자기 이름 뜻처럼 함부로 ‘꽃(華=花)’으로 보이길 ‘삼가(謹)’는 ‘저 만치’의 거리를 두려고 애쓴다. 시적 자아가 늘, 항상, 언제나 그렇다. 화자(話者)로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고수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감정의 이입과 이성의 논리가 절묘한 만치 균형감을 가지고 시를 대하게 된다. 그렇다. 이것은 시인 근화 씨, 특유의 시작(詩作) 힘이다.

일찍이 최영미(崔泳美, 1961~) 시인의 명시(名詩)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인하여, 나는 여자를 둘로 나누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서른 이전의 여자와 서른 이후의 여자로 말이다. 말하자면 서른 이전은 가수 변진섭의 노랫말처럼 흰색 면티 상의에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가요 ‘희망사항’ 부분)일 것이다. 거꾸로 서른 이후의 여자는 어떠한가. 치마로 허벅지살과 뱃살을 가려야만 하는 여자가 되고 밥을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만 나와서 집에서 양푼을 안고 열무김치에 참기름, 뜨거운 밥 두 공기를 넣고 쓱싹 비벼주는 그런 여자가 되어 간다. 그렇다. 여기서 청춘 지난 세월이 마냥 야속타. 그래서다. 흔히 여자 나이 서른이 지나면 잔치는 끝났다는 얘기에 크게 공감이 되는 것이다.

이근화의 화자 나이는 그래서 내 보기엔 ‘서른’ 안팎이다. 서른의 화자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화가처럼 시선을 클로즈업 시킨다. 자기 보다는 열 살은 족히 더 많은 한 여자를 주목한다. 그녀는 “시장 바구니에 커피 봉다리를 집어넣은 여자/ 빈 병에 커피를 채우고 커피물을 끓이는 여자/ 커피물이 끓을 동안 손톱을 깎는 여자/ 쇼팽을 들으면서 발톱마저 깎는 여자”이기도 하는데, 화자와 잘 아는 관계가 분명하다. 집안 식구이거나 이웃, 아니면 지인일 테다. 나이 서른, 진작 과거가 되었을 여자일 테다. 현실은 마흔 초반일 테다.

어쩌면 시인의 막내 이모일 것이다. 이모는 한때 잘 나갔다. 남자 친구들도 애인들도 많았을 것이다. 롤러장이 뜨던 시대엔 여고생이고, 카세트 테이프로 가제보의 ‘아이 라이크 쇼팽’이란 최신 댄스음악을 늘 들었으며 춤추고 좀 놀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쇼핑으로 겨우 커피 봉다리 챙긴 다음에 집에 와서는 “쇼팽을 들으면서 발톱마저 깎는 여자”로 화자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독차지했던 인기와 사랑을 다 잃어버린 여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습관적으로 “커피물을 바닥내고 다시 물을 올리”기를 일상에서 반복한다. 안간힘으로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그 좋아했던 “커피를 마시지 않”고 끊었을 것이다. 주저주저하다 서른이 훌쩍 다 지나가서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던 여자/ 횡단보도 앞에 서서 오래 울었”을 것이다. 어느새 이모처럼 서른이 된 화자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여자/ 오래 서서 울게 될 여자 신호등이 될 저 여자”의 나이가 될 자화상을 ‘저 만치’서 떨어져 지켜보고 있다. 화자인 나 자신도 머잖아 “손톱 발톱이 마구 자”라는 것을 무심히 이모처럼 손톱깎이로 들이대서 아무렇지도 않게 깎을 테지. 나 또한, 이모같이 늙어가겠지. 그러니 어쩌랴. 함부로 유일한 꽃(華)인양 아무 때나 자랑할 일이 아니다. 삼가(謹)해야 한다. 마땅히 이를 경계해야 된다. 그렇기에 이근화의 시는 낯설 수밖에 없으면서도 한편에선 친근하게 독자에 심중으로 깊이 박힌다. 가까이에 다가선다. 투명해진다. 신호등처럼.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리라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부분)

이근화의 시를 읽으면서 문득 나는 최영미의 시가 겹쳐졌다. 최영미는 서른이 이미 다 지났는데 나와 잔치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하고 울부짖었다면, 이근화는 “오래 서서 울게 될 여자 신호등이 될 저 여자”로 거리를 두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꽃인 ‘나’가 빠진 잔치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꽃을 지우고 ‘나’를 놓으면 내가 가야할 방향으로 신호등은 적색이 됐든, 청색이 됐든 간에 켜지게 마련이다. 한결 건너기가 수월해질 테다.

남자 왈, “쇼팽을 좋아하세요”

여자 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바야흐로 여름철이 성큼 왔다. 햇볕이 몹시 따갑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 늦게 산책을 나선다. 내가 잘 찾는 곳이 있다. 오산 서랑동에 위치한 서랑저수지 산책길이다. 산책하는 저녁에 개구리의 왈왈 소리와 퐁당퐁당 물고기 뛰어오르는 광경에 빙자해 친구에게 농담처럼 얘기했다.

한 남자가 있었어. 처음 본 여자가 예쁜 거야.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 차림인데도. 자기 맘에 쏙 들었어. 그래서 용기내서 다가갔지.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아무튼 그 남자가 이렇게 말했어. “쇼팽을 좋아하세요?” 그랬어. 그랬더니 그 여자가 남자에게 뭐라고 답했을 것 같아. “쇼핑이요. 좋아해요!”라고 대답했다. 쇼핑으로 분명하게 말했는데도 남자는 쇼팽으로 알아들은 거야. 그래서 둘이서 사귀게 됐다네. 어쨌다네. 하하하~

한 여자가 있었어. 평소에 마음에 둔 남자가 있었지. 남자가 참 잘 생겼거든. 직업도 좋고. 그래서 이 남자다, 싶었는데 왜 애인이 없을까 의문이 생겼어. 그래서 어느 날, 그 남자에게 물었어. “혹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그랬더니 남자가 뭐라고 답한 줄 알아. “아, 브람스요. 그 커피집 저 자주 갑니다”라고 말하더래.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여자가 저만치 횡단보도 건너가더래. 하하하~

뭔가. 이게 왜 실없는 농담이냐고. 아니야. 남자는 대화를 중요시 여기지 않아. 무조건 여자가 예쁘면 돼. 자기 눈엔. 그런데 여자는 아니야. 대화가 되는 남자를 만나야 해. 그러니까 자기는 날 잘 만난 거야. 우리는 대화가 되잖아. 키득키득~

일요일 저녁. 서랑저수지를 산책하면서 친구와 나눈 대화의 간추린 내용이다. 그날은 이근화 시인의 시와 제임스 티소의 그림 이야기를 가지고서 수다를 한참 떨었다. 티소의 그림을 보자. 정원의 나무가 황금색으로 물들고 있다. 나무 아래서 휴일을 즐기는 가족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누구나 느끼겠지만, 행복한 시간으로 다가설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해서, 우지현 작가의 설명이 주목할 만하다. 다음이 그것이다.

파리 상류층의 모습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티소는 프로이센에 점령당해 모두가 떠나버린 파리에 남아 ‘파리 코뮌(1871년 파리의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수립한 자치정부)’에 참여했다. 그러나 곧 정부군의 역습으로 인해 정권이 무너졌고 그는 체포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을 결심한다. 런던에 도착한 티소는 이름을 영국식으로 바꾸고, 영국인들의 기호에 맞는 초상화를 그리며 큰 인기를 얻었다. 대중들은 물론 평단도 그를 사랑했다. (중략) 그는 그곳에서 운명을 바꾼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평생의 연인이었던 캐슬린 뉴턴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티소의 집 근방에 있는 언니 부부의 집에 머물고 있던 캐슬린은 그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졌고 곧 동거에 들어갔는데, 이들의 사랑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녀는 혼외 자식을 낳은 이혼녀였고, 그런 그녀와 결혼이 아닌 동거를 택했다는 이유로 두 사람에게 극심한 비난이 쏟아졌다. (중략) 함께 산 지 얼마 뒤에는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고 이들은 단란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중략) 그림에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특히 정원은 작품의 단골 소재였는데, 햇빛을 피해 노란 양산을 쓰고 있는 그녀를 아름답게 묘사한 <여름>과 여유롭게 정원을 산책하는 장면을 그린 <파라솔을 든 뉴턴 부인>. 해먹에 누워 신문을 보며 한낮의 평화를 만끽하는 <해먹>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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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 ‘해먹’,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티소는 그녀를 위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병을 이길 수는 없었다. 지병인 폐결핵으로 인해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게 된 그녀는 그와 함께 산 지 불과 6년 뒤인 1882년,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그녀가 죽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은 티소는 며칠 동안 그녀의 관을 지키다가 모든 것을 그대로 버려둔 채 고향인 파리로 돌아가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그때부터 그는 종교에 전념하며 10년간 팔레스타인을 순례했고, 그녀를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윌리엄 에글린턴이라는 강신술사가 이끄는 모임에 참석해 죽은 그녀의 영혼과 만났다고 주장하며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말년에는 뷔용의 한 수도원에서 종교화에 몰두하면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티소는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라고 회상하곤 했는데 이는 캐슬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238~243쪽 참조)

<휴일>에 대한 이주은 작가의 설명은 이렇다.

어느 날씨 좋은 가을날 호수공원으로 소풍 온 친구들 사이에도 커피는 예외 없이 등장한다.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작업 활동을 펼쳤던 제임스 티소가 외광 아래 그린 <휴일>을 보라. 친구들이 야외에서 편안하게 오후의 커피타임을 벌이고 있다. 달콤한 과일파이와 파운드케이크 같은 것이 커피와 함께 곁들여져 있는 것도 눈에 뛴다. 줄무늬 옷 색깔마저도 블랙커피와 밀크를 연상시키며, 서로가 서로를 풍부하게 하고 조화롭게 하는 자리처럼 보인다. (이주은 <당신도, 그림처럼>, 162쪽 참조)

어쨌든 두 작가의 책에 등장하는 티소의 그림들과 이야기를 보고 만나면서 나는 백거이의 ‘장한가’가 다시 읽고 싶어졌다. 또한 ‘왜? 시와 그림을 보는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다. 결론은 이렇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내 곁에 그 누군가는 쇼팽도 좋아하고 브람스도 알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 서울 부암동 여행을 떠난다. 그 사람과 함께 가제보(GAZEBO)의 ‘아이 라이크 쇼팽(I Like Chopin)’을 들으면서 이근화의 시를 또 낭송해 보고, 티소의 그림에는 한결같이 왜 황금색 나뭇잎이 그려지는 것인지 밤새 주저리주저리 얘기하려고 한다. 뭐랄까, 눈에 띌 정도의 오줌. 그것만큼이라도 시와 그림은 우리를 다정하게 사이를 두게 할 것이다.

오늘이 그의 생일이다. 생일 선물로 내년이 오면 제임스 티소의 <해먹>을 주려고 한다. 침실에 걸어놓고 보라고. 강화도 바람숲그림책도서관 해먹에 누웠던 그 추억을 내 어찌 평생 잊으랴. 잊진 말라, 고(Go).

◆ 참고문헌

이근화 <칸트의 동물원>, 민음사, 2006.

이근화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창비, 2016.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비, 1994.

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위즈덤하우스, 2018.

이주은 <당신도, 그림처럼>, 아트북스, 2009.

이주헌 <그리다, 너를>, 아트북스, 2015.

프레드 사사키 외, 신해경 옮김 <누가 시를 읽는가>, 봄날의책, 2019.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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