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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한강 ‘회복기의 노래’와 피에르 보나르 ‘빛을 받는 누드’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나는 한강의 첫 시집에 실린 ‘회복기의 노래’와 수시로 만나는 편이다. 너무 좋아서다. 이따금 메모장에다 필사(筆寫)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그러자면 문득 두둥실 떠오르는 명화(名畵) 한 점이 시가 되어 욕조에서 빠져나온다. 여인이 벌거벗고 창가를 향하여 서서 빛을 받는 것처럼 사랑스럽게 한순간 보인다.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의 '빛을 받는 누드'(1908년 作)가 바로 그것이다.

이진우 기자

기사입력 : 2021-06-1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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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기의 노래 / 한강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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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보나르 ‘빛을 받는 누드’,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벨기에 왕립미술관.

“흔히 시인들은 시집 첫머리에 자신의 시적 지향이나 세계관을 함축적으로 담은 ‘서시’ 성격의 작품을 배치해두곤 한다.”

소설가 신경숙의 남편이자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그리고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왕성히 활동 중인 남진우(南眞祐, 1960~ )가 한 말이다.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서 보자면, 소설가이자 시인이고 작사가이면서 작곡가이기도 한 그. 한강(韓江, 1970~ )이 등단 20년 만에 펴낸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13년)에 등장하는 서시 성격의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을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다음은 시의 전문이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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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린 다니엘손 감보기 ‘아침 식사 후’,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여기 100여 년 전의 그림 한 점이 있다. 북유럽 여성 화가 엘린 다니엘손 감보기(Elin Kleopatra Danielson-Gambogi, 1861~1919)가 그린 <아침 식사 후>가 그것이다.

그림 속 모델, 시의 화자로 겹치다

그림 속 모델을 보자. 그 눈빛이 뭔가 공허한 느낌을 준다. 상념에 빠진 허망한 모습이랄까. 까닭을 모르는 오른 손은 담배를 낀 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식탁엔 버터 바른 빵, 삶은 계란, 커피와 차를 마신 흔적이 낭자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어지러워 보인다. 하지만 화면에서는 나름 질서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다해서 버티는 중이다. 차라리 평화롭다. 그러나 허전함과 고독함이 공기로 가득차서 쓸쓸한 분위기로 각인되는 시공간임을 차마 부정하긴 어렵다.

유리 꽃병에 꽂힌 흰 국화꽃은 계절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음을 암시한다. 꽃병 아래의 찻잔은 방금 전까지 아침 식사를 같이 한 누군가 여자의 곁에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건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지만, 그림 속 모델이 저 자세로 저녁까지 마냥 앉아 있을 것만 같다. 따라서 한강의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이란 시의 화자가 되어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하는 애매모호한 구절을 의미심장하게 읽을 것만 같다.

그렇다. 한강의 시는 인생의 스산함이 바스락거리는, 마흔의 가을! 시월의 분위기를 닮았다. 그래서 이 짧은 시는 독자에게 허기지도록 이끈다. 그러매 무연한 표정으로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는 나를 “어느 늦은 저녁”이 오면 우연히 마주치도록 초대할 것만 같다. 심리적으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면서 일렁인다. 시의 화자처럼 내 영혼이 대단히 예민해 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조용히 전달한다.

그림이 있어, 괜찮은 시를 만난 것인지, 아니면 좋은 시가 있어서 그런 그림이 생각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이상 묻지 마시라. 이렇게 변명하고 싶어지니까. 독서 후유증이라고….

“책을 많이 읽고 나면 강해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책을 바빠서 못 읽는 시기엔 사람이 희미해진달까,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느껴요. 책에 대한 허기가 져서 며칠 동안 정신없이 책을 몰아서 읽으면, 어느 순간 충전됐다, 강해졌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책을 읽지 않을 땐 자신이 부스러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읽고 나면 부스러졌던 부분이 다시 모아지는 느낌이 있어요.” (경향신문, 한강 “유튜브 다음은 다시 종이책”, 2019.6.19)

앞의 말은, 강남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 강연에서 작가 한강이 청중에게 한 말이다. 말을 가지고서 시와 그림을 내가 자꾸만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강조하고 싶어진다.

앞의 그림, <아침 식사 후>를 가지고서 최혜진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머리를 단정히 벗어 올리고 깨끗한 드레스를 꺼내 입고 아침 식탁에 앉았다. 눈 마주치는 사람에게는 가벼운 목례로 존중을 표한다. 버터 바른 빵, 삶은 계란, 커피와 차로 식사를 마친다. 탁탁, 성냥불을 켜 담배에 불을 붙인다. 후욱 숨을 내쉰다. 생각이 조금씩 이곳을 떠나 저곳을 향한다. 자신에게 허락된 좁고 따분한 공간 너머, 여자로서의 역할과 본분 너머 자유가 허락된 그곳을 꿈꾼다. 울타리 바깥으로, 행실을 제약하는 온갖 목소리가 사라진 공간으로, 이중 잣대 없는 곳으로, 자기 목소리와 자기 언어로 세상에 대해 읽고 말할 수 있는 자리로, 똑같은 1인분의 무게로 견해가 존중되는 장소로, 멀리, 멀리, 떠난다. (중략) 어느새 나도 함께 그 꿈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최혜진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227쪽 참조)

이렇듯 그림 속 모델로 ‘나’를 넣어 감정 이입을 시켜도 좋고, 더러는 시의 ‘화자’를 좇아 따라서 길을 걸어도 인생은 아름답고 충만한 여행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여인에게 욕실은, 아주 사적인 회복기 공간

나는 한강의 첫 시집에 실린 ‘회복기의 노래’와 수시로 만나는 편이다. 너무 좋아서다. 이따금 메모장에다 필사(筆寫)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그러자면 문득 두둥실 떠오르는 명화(名畵) 한 점이 시가 되어 욕조에서 빠져나온다. 여인이 벌거벗고 창가를 향하여 서서 빛을 받는 것처럼 사랑스럽게 한순간 보인다.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의 <빛을 받는 누드>(1908년 作)가 바로 그것이다. 미술평론가 이주헌 작가의 <그리다, 너를>(아트북스, 2015년)이란 책에도 문제의 그림은 나온다. 그림에 대한, 이주헌의 해설은 이렇다.

인상파풍의 감각적인 빛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마치 애무하는 손길처럼 빛이 여인의 몸을 어루만지고 빛을 받는 여인은 충족감에 싸여있다. 탄력 있는 몸에서 생동감이 느껴지는데, 보나르는 마르트를 그릴 때 이 그림에서처럼 늘 단단하고 봉긋한 가슴, 잘록한 허리, 리드미컬한 곡선을 즐겨 표현했다. 아직 현대식 욕조가 갖춰지지 않은 시절, 방에 널찍하고 둥근 대아를 갖다놓고 몸을 씻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트는 지금 막 목욕이 끝난 듯 몸에 향수를 뿌리고 있다. 여인의 몸을 감싸 안는 저 빛과 향수는 마르트를 향한 보나르의 세레나데일지 모른다. (이주헌 <그리다, 너를>, 155쪽 참조)

마르트(Marthe, 1869~1942)는 보나르의 영원한 뮤즈로서 처음 화가의 모델로 만났다가 나중엔 그의 아내가 된 그런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튼 화가에게 있어서 모델이란 ‘남’이라는 글자에서 획(­)이 빠지기가 십상이다. 종종 모델은 ‘님’으로 연인으로 아내로 발전하고 확장되기 때문이다. 처음에 마르트는 보나르에게 나이를 속였다. 1893년 일이다. 보나르는 26세, 마르트는 24세 때였는데, 그때 마르트가 자신의 나이는 열여섯이라고 보나르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르트는 늘, 항상, 언제나 보나르에게 솔직하지 못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지배적인 것을 보면 착한(?) 여자는 아닌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여자에게 집착적인 사랑을 보인 걸 감안하자면, 그림 속 여인처럼 꽤나 미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 그런 거다. 화가만이 아니다. 남자란 동물은 다 거기서 거기로 예쁜 여자를 좋아하게 마련이다.

화가이자 작가로 활동 중인 우지현의 <혼자 있기 좋은 방>에는 이런 글이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보나르는 부엌, 침실, 거실 등 일상의 공간을 그림의 주제로 다루었다. 특히 욕실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로 <욕실에서>, <웅크린 누드>, <푸른빛의 큰 누드>, <욕조 속의 누드와 작은 개>까지 많은 작품이 있다. (중략) 보나르가 목욕하는 장면을 이토록 많이 그린 것은 그의 아내 마르트가 여러 가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박증, 피해망상, 대인 기피증, 신경쇠약, 자폐증 등을 앓고 있던 그녀는 일생을 자신이 꾸민 상상의 세계 속에 깊이 침잠한 채 살았다. 오직 자신의 세상에 몰입해 타인과 어떠한 교류나 접촉도 원하지 않았으며, 가까운 거리에 나갈 때도 양산이나 모자로 얼굴을 가릴 정도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나타난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가 청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결벽증으로,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욕실에서 보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목욕하며 몸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했다. 보나르는 그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캔버스에 기록했다. 그 수가 384점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마치 화가의 일과가 마르트를 훔쳐보는 것뿐이었을 듯하다. 종일 자신을 쫓아다니는 그를 두고 시선에 감금된 것 같다며 마르크가 토로할 정도였다. 그만큼 보나르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에게 있어 마르트는 함께 살면서도 실체를 모르는 비밀스러운 존재였다.
(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76~79쪽 참조)

이상에서와 같이, 한 아름다운 여인에게 욕실이란, 어쩌면 재충전과 회복기를 위한 아주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이 되어야 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화가의 모델일 수밖에 없는 제약적인 요소는 마르트에게 짬을 내는 쉼을 휴식이 길게 허락되지 않아 보인다. 그럴 테다. 남편이자 화가인 보나르의 시선에 감금된 것 같은 포즈를 취하는 모델이 되어야 했으니….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화가의 모델은 서서 있었다. 하지만 시인의 모델인 화자는 달랐다. “누워 있을 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빛이 지날 때까지/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써 회복(回復)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만히” 향유(享有)할 수 있을 터. 짬짬이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남편이란 존재는 언제든 욕실을 피곤한 아내를 위하여 기꺼이 내줘야만 한다. 또한 아주 사적인 공간(?)을 그녀의 방으로 허락해줘야 한다. 그 시기는 마흔은 빠르고 쉰의 나이는 아주 적당한 타이밍 찬스가 된다.

솔직한 ‘나’ - 吾

남에게 보여주고픈 ‘나’ - 我

내 남자에겐 언제나 노래가 되고 별이 되고자 한 여자로서 ‘나’ - 儂

시인의 모델이 되는 화자(話者)인 ‘나’는 한자어 낱말로 보자면 ‘솔직한 나(吾)’와 ‘보여지는 나(我)’로서 구분할 수 있다. 일찍이 나는 졸저 <공자와 잡스를 잇다>(멘토프레스, 2011년)에서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다음이 그 내용으로 일부이다.

‘我’ 이는 ‘보이고 싶어하는 나’로 자형을 해체할 수 있습니다. 반으로 쪼개보세요. 그러면 手+戈=我로 이루어진 그림이 퍼즐조각처럼 펼쳐집니다. 다석 선생이 그랬다고 하지요. 요컨대 ‘아(我)는 상대방과의 무력전쟁 또는 대립을 함의하는 개념’이라고 말입니다. (중략) ‘我’ 이는 전쟁을 배경으로 탄생한 낱말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풀이하자면 전쟁에서 돌아오는 한 사람이 ‘손(手)에 창(戈)을 들고 걷는 문자 이미지’가 연상됩니다. 그런데 승패와는 하등 상관이 없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중략) 반면에 ‘吾’는 (타인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진짜 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심상훈 <공자와 잡스를 잇다>, 325~326쪽 참조)

이 책을 펴낸 지 벌써 10년이 됐다. 다시 보니, 여러모로 많이 부족한 책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동안 내 생각지도란 것이 영역 표시를 굳이 하자면 넓어졌고, 깊어졌음도 아울러 고백한다. 이제, 결론을 짓자면 이렇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로 ‘나’를 드러낸다. 하나는 솔직한 나로서 절대자, 신의 제단(口)에서는 작아지고(五) 솔직할 수밖에 없는 나(吾)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타인에게 보여주고픈 욕망의 나(我)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발견은 여인의 입장인데, 옛날 한시에서 보면 여성 목소리의 화자는 ‘나 농(儂)’이란 낱말을 즐겨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낱말을 해체하자. 그러면 내 남자이자 남편이 되기도 하는 타인(人=亻)을 향한 노래(曲)가 되고 싶고, 별(辰)로 반짝반짝 빛나고 싶은 여성의 욕망이 숨겨진 글자로서 한자어 ‘儂’ 자가 보였다.

그렇다. 보나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아내 마르트는 영원히 늙지 않고 탄탄한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의 모습인데, 이를 ‘我’라고 적을 수 있다. 반면에 여성 화가가 그린 <아침 식사 후>에 등장하는 모델은 감추려 하지 않는다. 매우 솔직한 ‘나(吾)’의 모습을 한 채,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도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어 담배를 엄지와 중지 사이에 꽂아 연기를 무럭무럭 흘리면서 검은 머릿결에다 바짝 들이대고 갖다 붙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인 한강이 내뱉는 화자의 목소리는 여성적인 것에 천착한다. 한계를 뚫어 구멍을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아름답고 차분하게 읽혀지는 특징을 보여준다. 모쪼록 내면을 거울로 보게 한다고나 할까. 그렇기에 나는, 한강의 시에 나타나는 화자로서 ‘나’를 ‘儂’ 자로 수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강의 첫 시집, 후미에 실린 <서시>의 일부를 보자.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이 시를 읽으면서 ‘운명’이란 시어에 나는 한참 붙들려 있었다. 그러다가 운명이 또 다른 ‘나’인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여성으로서 ‘나’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시인으로서의 운명과 여성적인 나로서의 충돌이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시인은 내면의 욕구에 둥지를 튼 ‘나’를 ‘당신’으로 표현한다. 그렇기에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그때는 언제일까. 그게 첫 시집에 어렴풋이 보인다. 제목인데 좀 길다. 차라리 시적이어서 반전이 생긴다. 필사(筆寫)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다음과 같다.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

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

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

이게 시의 제목이다. 본문은 이렇다. 아주 짧다. 두 줄이다.

어린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2005년. 계산하자면 시인의 나이가 마흔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간 서른여섯! 그렇다. 마흔이란, 나이가 오면 누구나 “이제부터 네 삶은 덤”으로 주어진 거라는 자기 욕망의 ‘비움’이 절실히 요구되는 그런 시기이기도 하다. 다 지나고 보니까, 그렇다. 그런 게 확 보인다.

◆ 참고문헌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사, 2014.

최혜진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은행나무, 2019.

이주헌 <그리다, 너를>, 아트북스, 2015.

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위즈덤하우스, 2018.

심상훈 <공자와 잡스를 잇다>, 멘토프레스, 2011.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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