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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 모든 스승은 제자가 자신보다 뛰어나길 바라는 마음인 듯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218)] 청출어람 청어람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기사입력 : 2021-08-2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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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평택 해군제2함대사령부 제2연평해전 전적비 앞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故 조천형 중사의 부인이 눈물을 흘리자 딸 조시은양이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사진=뉴시스
일상생활에서 많이 회자하는 말 중에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있다. 원래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고 해야 '쪽빛보다 더 푸르다(靑於藍)'는 의미가 갖추어지지만, 일반적으로 줄여서 청출어람이라고 쓴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로서 성악설(性惡說)을 창시한 순자(荀子)의 사상을 집록한 『순자』의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말이다. 제자는 학문을 그쳐서는 안 되고, 끊임없이 계속해서 스승을 능가해야 한다고 권면하는 내용이다. 이런 권면은 비단 동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도 명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제자로만 남아 있으면, 스승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릇 모든 스승은 제자가 자신보다 더 뛰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인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청출어람의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걸출한 바둑 기사(棋士) 스승 조훈현 9단과 제자 이창호 9단을 둘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천재 기사의 사제관계는 바둑을 잘 모르는 문외한이라도 다 알고 있는 전설이다.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은 보통의 사제관계가 아니다. 이창호 9단은 조훈현 9단의 내제자(內弟子)이다. 즉 84년 이 4단(당시)의 천재성이 알려지자 조 9단이 집에 함께 있으면서 가르치는 내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조 9단에게는 이 9단이 유일한 제자이다.

국내서 청출어람 대표 사례는 스승 조훈현 9단과 제자 이창호 꼽아

당시 한국 바둑계의 황제로서 군림하던 조 9단을 이기고 이 9단이 새로운 바둑계의 황제로 등극하자 바둑계는 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는 바둑과는 관련이 없던 호사가들도 이 충격적인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 자신이 직접 집에서 먹이고 입히고 재운 내제자에게 졸지에 황제의 자리를 빼앗긴 조 9단의 속내에 대해서도 궁금해 했고, 동시에 스승을 꺾고 황제에 오른 이 9단의 소감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조 9단은 나중에 이 9단이 처음부터 재목이라고 생각하고 내제자로 받아들였는지 질문을 받고 "아니요. 처음에는 '계륵'으로 생각했어요. 뭔가 아쉬운,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그런 정도로 보였어요. 한데 이렇게 잘할 줄 몰랐죠"라고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계륵으로 보였던 제자가 그렇게 빨리 스승에게 '보은(報恩)'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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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이 2006년 첫 사제 대결을 펼치고 있다.

바둑계에서는 제자가 실력으로 당당히 스승을 이겼을 때 비로소 스승의 은혜를 갚았다하여 '보은(報恩)'이란 표현을 쓴다고 한다. 바둑에는 사회에서 은밀히 통용되기도 하는 '정실(情實)'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모든 것이 반면의 승부에 의해서만 판가름 나기 때문에 사사로운 정이나 관계에 끌릴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스승의 은혜를 갚는 것은 오직 끊임없이 정진하여 실력으로 스승을 능가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진정한 제자의 도리를 다했다고, 즉 보은을 했다고 여긴다. 이것이 진정한 '청출어람'일 것이다.

세월이 지나 자신을 꺾었던 내제자 이 9단이 다른 젊은 기사에게 패하자 스승 조 9단은 "창호가 지니까 마음이 아팠다. 실력보다는 체력과 정신력에서 젊은 기사들을 당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패배의 원인을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체력과 정신력으로 돌리면서 제자의 명예를 지켜준 이 마음이야말로 또한 제자를 사랑하는 진정한 스승의 마음일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불러 거의 국민가요가 된 강소천 작사 권길상 작곡의 <스승의 은혜>에는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스승의 마음이나 부모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비단 살아계신 스승이나 부모뿐만 아니라 이미 작고하신 부모와 스승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더욱 발전하는 것도 아름다운 청출어람의 표본이 될 수 있다.

2002년 6월 29일 서해 북방한계선경비 중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희생된 제2연평해전의 영웅 조천형 중사의 딸 조시은씨가 아버지를 따라 해군의 길을 걷는다고 한다. 조양은 8월 6일 해군 학군단에 합격하여 졸업과 동시에 해군 장교의 길을 갈 예정이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주최한 '북녘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쓰기 대회'에서 당시 대전 복수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조시은씨는 "'왜 평화로운 우리나라에 쳐들어와서 아빠를 빼앗아갔냐' 소리치고 싶었지만, 탈북한 언니가 말라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족, 우리 동포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초등학생답지 않은 성숙한 편지를 써서 대상을 수상할 정도의 재원이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2008년 6월 29일에 열린 '제2연평해전 6주년 기념식'에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자 품에 안겨있던 어린 조시은씨가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는 사진을 볼 수 있다.

천안함 김태석 원사 딸 김해나양도 아버지따라 해군에

한편 2010년 천안함 폭침 당시 숨진 김태석 해군 원사의 딸 김해나양도 아버지를 따라 해군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김씨는 군 가산복무 지원금 지급 대상자(장교) 전형에 최종 합격했다. 그는 졸업 후 해군 소위로 임관될 예정이다. 김씨는 해군을 비롯해 공군과 해병대에도 이달 초 합격했으나 아버지를 따라 해군 간부의 길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은 그는 당시 천안함 침몰 12일 만에 함미(艦尾) 절단면 부근에서 발견된 김 원사의 주검이 흰 천에 덮여 구급대로 옮겨지는 걸 직접 목격했다. 김씨는 "아버지 같은 해군 간부가 되겠다"며 "아버지같이 훌륭한 해군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부담도 되지만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는 일이 없도록 열심히 하겠다"라고 밝혔다.

이밖에도 2020년 도쿄올림픽의 미담(美談) 중의 하나로 세간의 화제가 된 아버지 여홍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리스트와 이번에 동메달리스트가 된 딸 여서정 선수도 청출어람의 모델일 것이다. 이들은 똑같이 체조 도마 부분에서 한국 최초로 '부녀 메달리스트'라는 진귀한 기록을 세웠다. 비록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야구의 이정후 선수와 아버지 이종범 코치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들으며 한국 야구계의 전설이 된 아버지와 그에 못지않은 '야구 천재'라는 칭송을 받는 아들도 청출어람의 좋은 모범이 될 것이다.

이들은 세간에 많이 알려진 유명인들이기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은 사례에 불과하다. 우리 주위에는 비록 언론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부모와 스승의 은혜를 갚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이미 부모나 스승을 능가하는 성과를 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스승과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스승의 집에 내제자로 들어갈 필요도 없고, 부모가 순직(殉職)을 하는 비극이 필요하지도 않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부모나 스승들도 모두 자녀와 제자가 청출어람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또한 갑남을녀(甲男乙女)의 자녀나 제자들도 모두 '어버이의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보은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자녀와 제자를 통해 영생(永生)하기 원한다. 비록 생김새는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를지언정 '나의 마음과 정신'이 이들을 통해 계승된다면 비록 몸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언정 우리는 유한한 생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심리적으로는 영생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자녀나 제자도 역시 어려움이 많고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방향을 알려주는 부모나 스승의 정신을 내재화(內在化) 한다면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서의 항해도 겁날 것이 없을 것이다. 내재화된 부모와 스승은 등대(燈臺)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에 등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天地差異)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에는 마음속에 등대가 없는 눈앞의 이익을 따라 갈팡질팡하며 부초처럼 떠도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비록 부모나 스승을 능가하는 겉으로 나타나는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 정신을 마음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청출어람의 정신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미담이 넘쳐나는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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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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