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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김경미 ‘맨드라미와 나’와 앙리 마티스 ‘책 읽는 여인’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시와 그림을 읽는다는 것. 읽는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서른이 지나고 마흔이 되어서야 자기 “이목구비에 직업이 새겨지기 시작했다”(김경미 ‘마흔’ 부분)는 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타인들은 다 안다. 마흔이 지나고 쉰이 지난 내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화장발에 설레발에 더 이상은 속아주지 않는다. 그렇다. 독서하는 가을이 이듬해 네 얼굴에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줄 테다.

이진우 기자

기사입력 : 2021-08-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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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와 나 / 김경미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다 흐린 날씨는 내가

좋아하는 날씨


좋아하면 두통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화단의 맨드라미는 더 심하다

온통 붉다 못해 검다

곧 서리 내리고 실내엔 생선 굽는 냄새

길에는 양말 장수 가득할 텐데

달력을 태우고 달걀을 깨고 커튼에 커튼을 덧대고

혀의 온도를 올리고

모든 화단들이 조용히 동굴을 닫을 텐데

어머니에게 전화한다

대개는 체한 탓이니 손톱 밑을 바늘로 따거나

그냥 울거라

성급한 체기나 화기에는 눈물이 약이다

바늘을 들고 맨드라미 곁에 간다

가을은 떠나고

오늘 밤 우리는 함께 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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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 ‘책 읽는 여인’,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

‘삼상(三上)’이라는 말이 있다. 구양수가 시문(詩文)을 생각하기 좋은 장소라고 한 마상(馬上), 침상(枕上), 측상(廁上)을 가리킨다. 이 장소는 책 읽기에도 좋은 장소지만 단, 말 위는 현실적으로 전철 안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삼여(三餘)’라는 말도 있다. 위나라 동우가 학문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에게 학문을 하는 데는 삼여로 충분하다고 대답한 데서 기인한다. 겨울, 밤, 비가 올 때를 말하며, 겨울은 한 해의 남는 시간, 밤은 하루의 남는 시간, 비는 때때로 남는 시간을 가리킨다. 이 또한 독서에 대한 제언이라 할 수 있다. (쓰루가야 신이치 <책을 읽고 양을 잃다>, 161쪽 참조)

8월 넷째 주. 날이 오면 종일 흐리다. 흐린 날씨는 나를 가만히 방구석이란 섬에 갇힌 유배자로 두둥실 혼자 떠 있게 만들었다. 곁에는 끝없는 책들이 섬에 닿는 파도처럼 출렁이고. 엄지의 손톱 두께 정도 되는 시집들은 떼 지어서, 하루에 1센티미터 독서를. 그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속삭였다. 이웃집 젊은 여인처럼 유혹했다. 장소불문 침대·책상·소파·변기로 이어지는 시간은 내겐 구양수의 ‘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동우의 ‘삼여’가 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충분했다.

율곡과 매창이 사랑한 어머니, 책 읽는 엄마

앞의 시는 시인 김경미(金慶美, 1959~ )의 다섯 번째 시집 <밤의 입국 심사>(문학과지성사, 2014년) 1부에 나온다. 시집 제목이 된 ‘밤의 입국 심사’라는 말은 목차에서 2부에 실린 ‘연애의 횟수’ 전문 끝에 보인다. 이를테면 “밤의 입국심사서를 써야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가 그것이다. 이 한 줄의 시에서 편집자가 제목을 가져다가 쓴 것이리라.

시집 말미에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홍정선은 이렇게 시집을 비평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김경미는 불편하게 살아가는 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며, 그것을 시적 모색의 대상으로 삼은 시인이다. 세상과의 관계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면적 자아와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스스로의 운명으로 만든 보기 드문 시인이다. (중략) 김경미는 쉽게 즐거운 시를 생산하는 상당수 시인들보다 좋은 시를 쓸 가능성이 훨씬 큰 시인이다. (중략) 자신의 예민한 촉각과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기로 넘어간 것이다. (중략) 김경미는 과거 속에서는 안온하고 현재 속에서는 불편하다. (중략) 김경미의 이번 시집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나’라는 이상함에 대한 고백과 그 이상함이 주는 불편함을 성찰하는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홍정선 해설 <밤의 입국 심사>, 166~18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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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필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20세기, 종이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어머니에게 전화한다

대개는 체한 탓이니 손톱 밑을 바늘로 따거나

그냥 울거라

성급한 체기나 화기에는 눈물이 약이다


넉 줄의 시에서 필자는 독자가 어머니의 아들일 때, 혹은 딸일 때의 입장으로 문득 전화를 자신의 모친에게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남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되어 느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프랑스 출신의 대표적인 색채화가로 유명했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가 즐겨 많은 작품을 시리즈로 남긴 독서하는 여인의 그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시 말해, 이미 앞에 소개한 <책 읽는 여인>(1921년 作)에 등장하는 모델에게 우리의 한복을 입힌다면 그게 바로 신사임당의 모습이지 싶은, 그런 엉뚱한 상상을 몰래 해보았다.

참고로 조안나 작가의 <그림이 있어 괜찮은 하루>(마로니에북스, 2019년)는 이렇듯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한 여인이 파라솔 옆에서 고요히 책을 읽고 있다. 앙리 마티스는 빨간색만큼이나 검은색을 잘 쓰는 화가인데, 이 <책 읽는 여인> 그림도 테이블의 무거운 무채색이 분위기를 근사하게 이끈다. 차분한 분위기 탓인지 더욱 책 읽는 풍경에 집중하게 된다. (중략) 고맙게도 그는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의 그림을 아주 많이 남겼다. 모든 기쁨의 근원이 개개인의 내면에 있다고 생각했던 마티스. 그의 빛이 되었던 그림들은 하나같이 “단지 느끼면 된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중략) 같은 책을 읽어도 만 가지의 반응이 나오도록, 자유로운 마티스의 그림처럼 같은 사물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가만히 즐겨 바라보는 그림들 속에 진정한 마음 혁명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같은 책, 224~229쪽 참조)

조안나와 홍정선의 말을 곱씹으면서 나는 <책 읽는 여인>의 엉거주춤한 자세에 주목했다. 저것도 모델에게 요구한 앙리 마티스의 세심함. 즉 자발적으로 선택한 불편함, 그것이 아닌가. 팔을 검정 테이블에 괸 여인의 시선은 평안해 보이나, 한편으로는 어쩐지 오른쪽 팔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왼쪽 팔이 차츰차츰 균형을 잃어서 곧 모자가 보이는 쪽, 땅바닥으로 이윽고 쓰러질 것처럼 그림 속 모델은 내겐 조금은 불편하게 감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림 속 모델이 엄마일 때가 되면, 쓰러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 우는 아들에게 혹은 급체한 딸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달려갈 것만 같다. 이윽고 아들과 딸을 달래는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게 들릴 테다. 예컨대 김경미의 시처럼 “대개는 체한 탓이니 손톱 밑을 바늘로 따거나/ 그냥 울거라/ 성급한 체기나 화기에는 눈물이 약”이라고 말할 테다. 그것도 건조하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이다. 아이들 곁에 그냥 엄마는 항상 서 있을 것만 같은 그림으로 상상이 펼쳐진다.

가을은 시작되고, 구월의 금요일 밤 우리는

여름이 끝나고 있다. 막바지에 온 느낌이다. 날씨가 그렇다. 아침과 밤이 서늘해졌기 때문이다. 김경미의 ‘맨드라미와 나’는 계절상 가을을 단적으로 가리킨다. 그것도 늦가을이다. 그렇기에 머잖아 추운 겨울이 닥칠 분위기를 시상이 말해준다. 시의 화자가 가꾼 정원의 “화단의 맨드라미” 꽃은 그래서 “온통 붉다 못해 검”은 색을 드러낸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급체한 것처럼. 혹은 두통의 화기가 도진 사람의 모습처럼 의인화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화로 일러준 어머니 말씀을 따라서 화자는 “바늘을 들고 맨드라미 곁에” 선 것이다. 그렇게 해마다 반복되는 “가을은 떠나고/오늘 밤”엔 맨드라미와 나 “우리는 함께 울 것”을 결심하는 것이다.

아무튼 맨드라미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 중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 신사임당의 그림을 해설하면서 미술평론가 탁현규 박사는 <사임당의 뜰>(인그라픽스, 2017년)에다 이렇게 글을 달았다. 다음이 그것들이다.

“맨드라미의 꽃대가 곧게 올라와서 주름이 많고 크고 붉은 꽃잎을 화려하게 뽐낸다. 국화와 더불어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다. 그래서 국화의 일종인 개미취와 같이 그린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풀은 사임당 초충도에 가장 흔하게 나오는 바랭이 풀이다.” (같은 책, 91쪽 참조)

“맨드라미는 닭 벼슬을 닮았다. 꽃잎의 색도 닭 벼슬처럼 붉다. 그래서 맨드라미를 한자로 계관(鷄冠)이라 한다. 벼슬을 하면 관을 머리에 쓰기 때문이다. 따라서 맨드라미는 벼슬살이를 뜻한다. 관직에 오르고 싶은 선비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같은 책, 42쪽 참조)

우리 나이, 48세로 생애를 다한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오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화가로도 유명한 이매창(李梅窓, 1529~ ? )은 장녀이고, 조선 중기의 학자로 정치가로 유명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 1584)는 슬하 4남 3녀 자녀 중에서 셋째다. 어쨌거나 사임당이 그렸다는 그림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사임당초충화첩>, 국립중앙박물관이 간직하는 <신사임당필초충도>,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이 아끼는 <신사임당초충도병>을 통해서 우리는 만날 수가 있다. 딸만 있고, 아들이 없던 신씨 집안에서 태어난 사임당은 아들을 상징하는 오이, 가지, 원추리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아울러 ‘맨드라미’를 자주 그렸는데 이는 아들의 출사(出仕)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평소 생활에서 책 읽는 엄마로서 자식에게 본보기를 보여줬다. 이를 통해 조선 최고의 석학인 율곡이 역사에 길이 남은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과언은 아닐 테다.

다음은 간송미술관 백인산 연구실장이 쓴 책 <간송미술 36 회화>(컬쳐그라퍼, 2014년)에 등장하는 한 내용이다. 내용이 신사임당을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사임당 신씨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잘 알려져 있으며, 시문과 서화에 모두 능했던 문인으로도 명성이 높다. 특히 그림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 화가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하고 있다. 이런 명성에 걸맞게 현전하는 작품도 상당하여 동시기에 활동했던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들이 그녀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략) 신사임당은 훌륭한 화가이기보다는 율곡을 낳은 어머니로서의 위상이 더 중요했다.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그림은 산수보다는 초충이나 화조가 제격이었다. (중략) 조선 후기는 율곡학파가 대세를 장악했고, 이와 비례하여 신사임당의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율곡학파의 문인들에게 신사임당의 그림은 마치 가문의 품격과 위상을 담보하는 문장(紋章)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신사임당의 작품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모작과 위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미 초충도의 대가로 인식되었기에 많은 초충도가 그녀의 이름을 빌려 양산되었다. 이것이 그녀의 작품이 초충도 위주로 남아 있는 이유이며, 또 그녀의 작품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같은 책, 26~30쪽 참조)

앞의 글 중에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그림은 산수보다는 초충이나 화조가 제격이었다”라는 내용에 공감이 되는 바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시선에서 남성적 우월주의가 언뜻 보인다. 그렇기에 날카로운 해설과 비평에도 약간은 독자로서 불편함이 느껴진다. 이조차도 율곡학파의 영향력이 지금까지 내게 미치는 세뇌(洗腦) 탓일까.

나, 무엇을 들고 맨드라미 곁으로 가야 하나

강릉과 서울로 오가는 주말 부부가 지금도 있긴 하다. 옛날 조선 시대보다는 조금은 덜 불편하겠지만. 아무리 교통이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불편함이 없을 수 없을 테다.

원수 같은 사임당의 남편 이원수가 마침내 한양에서 출사에 성공해서 사임당이 38세가 되던 해에 처음 살림살이가 도성 수진방(현재 청진동)에 펼쳐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임당이 48세가 되던 해 지금의 삼청동으로 이사했고 남편은 수운판관이 되어 평안도로 임지로 떠나고 얼마 안 되어서 갑자기 사임당은 병사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한다. 그때 남편 이원수는 51세였다. 이후로 남편은 재혼하고 10년을 더 살았다고 하니 정말 알 수 없는 게 팔자이고 운명인 것 같다.

청진동도 그렇고, 삼청동 집 후원 뜰에도 사임당이 머무는 처소에는 수많은 꽃과 나무가 정원이 되어 차지했을 테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맨드라미꽃을 보면서 사임당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름을 다한 능소화와 목백일홍이 힘이 다 빠질 때, 맨드라미와 국화꽃은 때마침 화단을 잠식했을 테다.

서른 셋. 그 나이에 이르러서 율곡을 낳았단다. 그러니 아들은 막 십대 소년이 되었을 무렵이다. 아들의 장원급제를 바라는 진심을 담아 붓을 들어 맨드라미를 그리며 종이에다 채색하는 사임당의 뒷모습이 상상된다. 그렇다. 한 손에는 책을, 또 다른 한 손에는 붓을 든 어머니가 보인다.

반면에 김경미는 해마다 가을이 오면 화단에 “바늘을 들고 맨드라미 곁”으로 바짝 다가설 테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들고서 가을을 맞이해야 할까?

시와 그림을 읽는다는 것. 읽는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서른이 지나고 마흔이 되어서야 자기 “이목구비에 직업이 새겨지기 시작했다”(김경미 ‘마흔’ 부분)는 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타인들은 다 안다. 마흔이 지나고 쉰이 지난 내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화장발에 설레발에 더 이상은 속아주지 않는다. 그렇다. 독서하는 가을이 이듬해 네 얼굴에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줄 테다.

앙리 마티스의 <책 읽는 여인>의 녹색 파라솔은 해가 강하면 양산이 되기도 하고, 비가 오면 우산이 될 테다. 그리고 책은 눈동자의 별이 되어 박힐 테다. 목에 두른 목걸이보다 더 반짝이는. 그림 속 주인공처럼, 책 읽는 여인을 곁에 두고 맨드라미로 이 가을엔 오랫동안 나는 보고 싶다. 아니면 쇠똥벌레처럼 쇠똥이라도 곁에서 굴리고 싶다.

◆ 참고문헌

김경미 <밤의 입국 심사>, 문학과지성사, 2014.

쓰루가야 신이치, 최경국 옮김 <책을 읽고 양을 잃다>, 이순, 2010.

탁현규 <사임당의 뜰>, 인그라픽스, 2017.

조안나 <그림이 있어 괜찮은 하루>, 마로니에북스, 2019.

백인산 <간송미술 36 회화>, 컬쳐그라퍼, 2014.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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