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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사랑으로 노래하고, 사랑이 빚은 ‘행복의 빛깔’

(부제) 유치환 ‘행복’과 르누와르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우린 사랑해야 한다. 사랑할 누군가가 있어야지 우린 버틸 수 있다. 행복할 수 있다. 아니 그런가? 어쨌건 만날 수 있고, 문자나 편지로 안부를 나누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남편이나 아내, 가족이나 연인, 친구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행복하고 삶을 기쁘게 펄떡이게 한다.

이진우 기자

기사입력 : 2021-09-1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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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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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와르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너나들이. ‘너나들이’란 서로 ‘너’니 ‘나’니 그렇게 부르며 터놓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를 뜻하는 낱말이다. 이게 남녀도 가능할까. 학창시절 처음엔 서로가 친구였다가, 어느새 성인이 되어서는 애인의 관계로 발전하고, 결혼적령기에 이르러서는 부부가 되는 기막힌 인연. 그런 만남이 어찌 내 주변엔들 찾으면 없으랴. 있긴 있을 테다.

고등학교 동창친구 이야기다. 1학년 때 만난 여자친구와 어느 날부터 연애를 시작하더니, 서른이 오기 훨씬 전엔가 둘은 결혼했다. 부부가 되었고 자식도 낳았다. 지금까지도 그 부부는 친구처럼 너나들이하는 사이로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게 보기에 너무 좋았다. 참 부러웠다. 친구가 애인이 되고, 애인으로 만나서 서로 부부가 되는 길은 얼마나 험난한가. 게다가 부부가 되어서는 자식을 낳고 애인처럼, 친구처럼 서로 챙기고 배려하는 다정한 그 모습이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사랑 시편 ‘행복’

앞의 시를 한양대 국어교육과 정재찬 교수가 쓴 베스트셀러 <시를 잊은 그대에게>(휴머니스트, 2015년)에서도 만난 적이 있다. 책은 ‘전봇지’를 ‘전보지’로 고치고, ‘흥클어진’을 두고서 ‘헝클어진’로 수정했다. 이뿐만 아니다. 전문을 3연으로 나눴는데 차라리 앞에 시처럼 4연으로 나누어 읽는 느낌이나 기쁨에는 좀 미치지 못한다. 여운이 그러하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2행에 마침표(.)가 나온다. 그러니 봄부터(새학기) 사랑이 시작된 거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으니 그새 여름이 계절로 보인다. 그러니까 여름이 시의 2연을 차지한 셈이다. 그러다가 3연에 와서는 돌연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이라고 했다. 이렇듯 계절은 어느새 성큼 가을이 다가옴을 구상하도록 유도한다.

이윽고 4연에선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는 시기를 따지자면 마치 한겨울인 것처럼 냉기가 번진다. 또한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라는 구절에 다다르면 연애하는 남녀의 이별, 즉 헤어짐이 오롯이 독자 손끝에 전율처럼 만져진다. 온통 꿰매진다. 아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라는 끝내기 한방은 또 얼마나 유행가 가사처럼 우리를 슬프고 아프고 가시가 머리에 박힌 것처럼 고통을 겪게 하는가.

어쨌건 시에서 사랑은 현재진행형이 아닌, 이젠 옛사랑으로 대우하며 예의를 다해서 마치려고 결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로 돌아가서 옛사랑을 기억하며 행복을 주유하기에 이른다. 그렇다. 사랑하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가치를 ‘나’에게 선물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고 ‘나’의 안녕을 물을 수가 있는 것이다.

시를 상세하게 해설하는 정채찬 교수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생명파의 시인으로 알려진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여성적이고 감상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던 당시의 우리 시단과 확연히 차별되는 성격의 작품을 남긴 시인. 하지만 그의 시를 지나치게 남성적, 관념적, 의지적인 것으로 못 박는 것만은 사양해야 할 일이다. (같은 책, 219쪽 참조)

청마는 통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훗날 극작가로 성공한 형 유치진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가 도오야마 중학교를 다니다가 한의원을 하던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귀국해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한 그는 진명유치원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중략) 청마의 여성편력은 간단치가 않았던 성싶다. 그러던 그가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되면서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며 애련에 물들어 버리는 사태가 전개되고 만다.

그녀가 바로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1916~1976)다. 스물한 살 때 결혼하여 대구에 살았던 정운, 그녀는 남편이 폐결핵을 앓자 약국을 경영하던 언니가 살고 있는 통영으로 옮겨오게 된다. 하지만 해방 닷새를 앞두고 남편은 결국 딸자식 하나를 남겨둔 체 세상을 떠난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정운은 이듬해인 1946년 10월 통영여자중학교의 강사로 나서게 되었다. 그곳에는 해방 직전 만주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1945년 10월부터 교편을 잡고 있던 청마가 있었다. 이리하여 시인 남녀가 한 학교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같은 책, 222~223쪽 참조)

서른여덟의 청마는 갓 서른이 된 정운의 미모와 재능 앞에서 눈이 멀고 만다. 한복을 즐겨 입던 그녀의 단아한 아름다움은 이미 당대 많은 문우의 마음을 설레게 했거니와 무엇보다 문학을 비롯하여 그녀의 정신세계를 공유하면 할수록 청마는 혼절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시와 편지를 바친다. 그러나 정운은 비록 홀몸이긴 하나 유교적이고 전통적인 규범을 깨뜨릴 수 없었고 더욱이 청마는 유부남이었던 것. 정운은 마음의 문을 닫고 청마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럴수록 청마는 가슴을 앓는다. (중략) 그의 편지는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곤 했다. 연애할 때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하는 판에, 시인이 연애를 하기 시작했으니 오죽하랴. (같은 책, 224쪽 참조)

이 시, 특히 마지막 연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이것은 우리 한국인에게 시구가 아니라 만고불변의 경구처럼 되었다.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것은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헌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연애편지를 쓸 때면 줄곧 베껴 쓰곤 하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두 구 사이의 한 줄, 곧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라는 대목.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낸 그 정도의 정성과 사랑을 바친 이에게만 그 경구의 헌사가 합당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청마는 정운과의 사랑을 통해 결국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사랑 시편 「행복」을 남기게 된다. (같은 책, 230쪽 참조)

아무튼 청마와 정운은 동료로만 결국에 남았다. 너나들이 하지 못한 결과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마나 정운은 남은 생을 행복했을 테다. 왜냐하면 한때 사랑의 기억이 있어서 무엇보다 행복을 감당해냈기 때문이다. 다시 우리 솔직히 말해보자. 살면서 언제 가장 행복했나? 당신이 사랑을 줄 때인가. 아니면 내가 사랑 받을 때 그랬던가.

너, 지금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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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크 베렌스키올 ‘기억’,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미국, 개인소장.

청마 유치환의 사랑 시편 <행복>은 이 가을에 와서 다시 봐도 가슴을 울린다. 사랑을 던져주는 감동이 행복의 빛깔로 번짐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내 서가엔 미술평론가 이주은 책들이 빼곡하다. 그 중에 한 권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이봄, 2013년)를 통해 처음 본 그림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소개한다. 에리크 베렌스키올(Erik Werenskiold, 1855~1938)의 <기억>이란 작품이 그것이다. 이처럼 좋은 그림을 만나는 재미와 쓸모란 바로 이거지 싶다.

현실을 외면하는 듯 백일몽에 빠진 여인의 모습은 19세기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한다. (중략) 몽환적인 분위기 속의 두 여인이 등장한다. 실제로 둘은 자매였는데, 눈을 감고 있는 왼편의 여인은 화가의 아내 소피이다. 소피는 뮌헨에서 화가 수업을 받던 중 남편을 만났고, 결혼하고 바로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화가로서의 삶을 아예 접었다.

정원을 내다보며 손으로 턱을 괸 오른쪽 여인은 그녀의 언니이다. 자매는 각각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은 눈을 감는 것으로 ‘지금’을 애써 유지하고자 하고, 또 한 사람은 먼 곳을 바라봄으로써 ‘여기’를 부정한다. 자신에게서 바깥 세계를 차단하려는 여인과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눈길을 돌리는 여인이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
(같은 책, 105쪽 참조)

눈을 감고 잠든 여인은 아마도 ‘꿈’을 꿀 테다. 하루에 고단한 살림살이에 지친 표정을 설령 하고는 있지만 ‘가족’이 있기에 자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은 밝아질 테다. 반면에 그녀의 언니는 바깥 세계를 동경하는 모습이다. 그 눈빛이 반짝이지 않는다. 맥없이 텅 빈 느낌이다. 왼손에 빨간 쥘부채를 쥐고 짙푸른 원피스 무릎에 받치고 있는데 지나간 옛사랑이나 행복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표정이다.

그렇다. 사랑을 받는 쪽은 동생일 테다. 그런가 하면 언니는 동생처럼 행복해지기 위해서 바깥 세계를 나아가 사랑을 하고 싶은 쪽이 맞을 테다. 창밖에 보이는 꽃처럼 피었다가 지는 것이 어쩌면 사랑이고, 행복이 아닐까, 하는 그런 속내를 감추고서 말이다. 머잖아 잠에서 깬 동생을 보고는 언니가 “너, 지금 행복하니?”하고 불쑥 질문할지도 어쩌면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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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미국 반즈 재단 미술관.

앞에 그림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가 그렸고 제목을 <삶의 기쁨>(1906년 作)이라고 달았다. 다양한 빛깔, 즉 빨강, 노랑, 초록, 파랑을 좇다 보면 벌거벗은 사람들, 즉 남녀가 화폭에 군데군데 보인다.

그림 앞쪽에는 한 여인이 피리를 불고 있고, 그 옆에는 서로를 감싸 안은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여인들의 자세는 고혹적이고 뒤에서는 다 같이 손을 잡고 둥글게 돌며 춤을 추고 있고요. 각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다르지만 모두가 행복에 젖어 있죠. (정우철 <내가 사랑한 화가들>, 52쪽 참조)

마티스의 그림을 한참 보노라면, 실은 삶의 기쁨이란 종종 사랑이 빚은 행복의 빛깔로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특히 남녀의 사랑은 답답한 겉치레의 옷을 모두 벗을 때, 비로소 진가를 드러난다고 믿었을까, 화가의 붓질에서 가린 구석은 나무 외엔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알몸이 되어 홀딱 벗어던지는 솔직함이야말로 남녀 간에 있어서 사랑은 필요하다. 이것이 삶의 기쁨으로 작용한다. 요컨대 행복해질 수 있는 필요조건이 된다.

하지만 섹스를 한다고 마냥 행복한 것만도 아니다. 궁극에는 아버지가 되고, 엄마가 되어서는 가족으로 사랑은 확대된다. 사랑을 나누는 가족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의 출세작인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1878년 作)을 보자. 그림은 한눈에 봐도 행복에 겨운 가족의 모습을 사진처럼 취하고 있다.

인상파 중에서도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비교적 빨리 출세할 수 있었다. 계기는 르누아르가 서른일곱 살 때 제작한 초상화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이라는 작품이었다. (나카노 교코, 최재혁 옮김 <운명의 그림>, 216쪽 참조)

작품에는 아빠는 보이지 않고 대신에 젊은 엄마와 어린 두 자매가 같이 등장한다. 한가운데 앉아 있는 아이의 정체는 실은 남자 아이다. 딸이 아니라 아들이다. 누나와 똑같은 옅은 파란색과 흰색이 조합된 최신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착각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여자아이보다 남자아이의 사망률이 높아서 그런 여자 아이 옷을 남자 아이에게 입히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전한다.

고급스런 거실에서 엄마가 아이들과 나란히 행복을 만끽하는 시간을 담은 작품을 대하노라면 필자는 청마의 시가 생각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고 그림 속 엄마가 곧 말할 것만 같다. 사랑을 놓치고 잃어버린 <기억>의 언니와 사뭇 다른 밝은 표정으로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라고 이생을 잘 마쳐야 할 것이다. 유치환의 <행복>이란 시편과 앞의 세 그림은 그것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고 있다.

르누와르의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이란 그림 속에서 왜 아버지 모습은 빠졌을까. 아버지 조르주 샤르팡티에는 잘 나가는 출판사의 사장이었다. 바빠도 너무 바빴다. 해서 오기로 해놓고는 일 때문에 자기 집 거실에 차마 도착하지 못한 것이다.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 수만 있다면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칠언절구로 보냈을까. 다음에 나오는 한시는 칠언절구로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 812~858)이 지었다. 제목이 <야우기북(夜雨寄北)>이다. ‘기(寄)’는 편지를 ‘부친다’를 의미한다. ‘북(北)’은 아내 왕씨가 살고 있는 집의 위치를 가리킨다.

夜雨寄北 / 李商隱

君問歸期未有期 (군문귀기미유기)

巴山夜雨漲秋池 (파산야우창추지)

何當共剪西窓燭 (하당공전서창촉)

却話巴山夜雨時 (각화파산야우시)

당신은 돌아올 날 묻지만 기약할 수 없어요

여기 파산은 밤비가 가을 못에 차서 넘치오

어느 때나 서창의 촛불 심지 함께 자르면서

파산의 밤비 내리던 때를 (당신에게) 말해줄까요


아내가 있는 남편의 입장이란 게 천년을 거슬러 올라간 중국 당나라 시절이나, 백 년 이상의 파리 땅이나 ‘입에 풀칠하는 일’로 함부로 기약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언뜻 쓸쓸해 보이나, 필자는 한시가 행간에 행복을 감추고 있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당신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이란 ‘사랑(思量)’이 아니고 또 뭐겠는가.

앞의 <기억>이란 그림을 다시 보자. 그림 속에서 남편이 있는 여인은 눈을 감았다. 여인의 언니는 왜 창밖을 망연자실 바라보았을까. 남편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동생은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어 몸은 고되고 힘들지만 행복해 보이니 그게 부러운 표정이 아닌가.

곧 있으면 추석(秋夕)이다. 남편이나 아내가 있는 입장은 입에 풀칠을 하느라고 멀리 잠시 떨어져 있더라도 보름달처럼 환한 미소가 입가에 맺힐 테다. 하지만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가 된 남편이나 아내의 입장은 많이 다를 테다. 돈·직장·명예가 제법 있다고 해서 쓸쓸하고 허전함이 어디 다 말끔히 지워지랴. 그러니 어쩌랴. 우린 사랑해야 한다. 사랑할 누군가가 있어야지 우린 버틸 수 있다. 행복할 수 있다. 아니 그런가?

어쨌건 만날 수 있고, 문자나 편지로 안부를 나누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남편이나 아내, 가족이나 연인, 친구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행복하고 삶을 기쁘게 펄떡이게 한다.

◆ 참고문헌

유치환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시인생각, 2013.

류근·진혜원 엮음 <당신에게 시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해냄, 2021.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휴머니스트, 2015.

나가노 교코, 최재혁 옮김 <운명의 그림>, 세미콜론, 2019.

정우철 <내가 사랑한 화가들>, 나무의철학, 2021.

이주은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이봄, 2013.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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