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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고향 들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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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아침 일찍 고향으로 향했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기 위해서다. 한해살이풀들이 마르기 시작한다는 처서 무렵이면 늘 하곤 했는데 올해는 좀 늦었다. 고향집 헛간에서 녹슬어 가던 예초기를 꺼내어 손을 보고 낫과 갈퀴 등을 챙겨 선산을 올랐다. 어느새 길가엔 낭창거리는 코스모스가 산들바람을 타고 한껏 높아진 쪽빛 하늘엔 흰 뭉게구름이 목화송이처럼 피어 있다.


초록들판엔 벼 이삭들이 수런거리며 익어가고 인적 없는 논두렁을 한가로이 거닐던 백로 한 마리 건너편 솔숲으로 느리게 날아가는 모습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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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을 오르는 길섶엔 연보랏빛 쑥부쟁이, 꽃 며느리밥풀, 진홍빛 물봉선, 나도송이풀꽃, 이질풀, 고마리, 며느리밑씻개, 비름나물꽃 같은 들꽃들이 연신 나의 눈길을 유혹한다. 마주치는 꽃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다가 도토리를 물고 가는 다람쥐와 잣나무 위를 건너다니는 청솔모의 날랜 몸짓을 바라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란 모두가 저마다 열심히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눈물겨운 까닭도 그 언저리에 있지 않을까 싶다.


예초기에 시동을 걸고 봉분 위에 무성한 풀들을 베어낸다. 예초기의 날이 스칠 때마다 여지없이 풀들이 쓰러지며 비릿한 풀 향기가 코끝을 훅 스친다. 그러고 보면 풀 향기란 자신을 잊지 말라는 풀들의 마지막 주문 같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쓰러진 풀들을 갈퀴로 긁어모아 큰 나무 밑에 쌓았다. 베어진 풀들은 썩어 거름이 되어 큰 나무를 더욱 크고 무성하게 자라게 할 것이다. 선산에 누워 계신 나의 부모님이 지금의 나를 키우신 것처럼.

벌초를 마치고 고향들길을 걸었다. 저녁 햇살을 등에 지고 반짝이는 억새꽃이 바람을 타는 들길을 걷다보면 지나온 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산그늘이 빈 들판에 길게 누울 무렵, 들길을 따라 걷다보면 막막하던 가슴에도 숨통이 트이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던 마음도 차분히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저무는 가을꽃들을 바라보노라면 바투 잡고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의 고삐를 느슨하게 놓아주고 싶어진다.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꽃 하얀 영혼 앞에 서면 절로 걸음이 멈추어지고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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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는 줄기가 가늘어 잘 휘어지지만 갈대는 매우 단단해 웬만해선 꺾이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꽃이라고 부르는 흰 수염처럼 생긴 술은 바람에 날려 보낼 종자에 털을 가득 매어단 열매다. 억새와 갈대를 가장 쉽게 구별하는 방법은 그 꽃차례의 크기나 부피를 보고 구분하는 것이다. 억새는 밑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빗자루와도 같은 깔끔한 모양이지만 갈대는 가지가 위로 올라가면서 여러 번 갈라지기 때문에 마치 머리카락이 엉킨 듯한 풍성한 느낌이 든다.

가을들녘에서 만나지는 눈부신 억새꽃을 보면 억새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던 우악스러움은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는다. 억새라는 이름은 청청하던 여름날의 훈장 같은 것이다. 무모한 도전마저도 겁 없는 열정으로 마다하지 않던 우리들의 젊은 날처럼 억새도 봄과 여름을 지나는 동안엔 키를 키우고 이파리마다 날을 세운다. 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만큼 꼿꼿이 대를 세우고 칼날 같은 이파리는 슬쩍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남긴다. 누구라도 여름숲길에서 억새에 베인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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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에 눈부신 억새꽃을 보면 젊은 날을 잘 살아온 노년의 신사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다. 한때는 날을 세우며 모나게 살아왔지만 이제는 삶의 중심에서 한걸음 비껴선 듯한 모습이다. 한 올의 소슬바람에도 가볍게 떠날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진 얼굴빛이 순한 고향의 어르신을 뵙는 것만 같다. 나이 듦은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서슬 퍼런 날을 세우며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날들은 이미 지나갔음을 순순히 수긍하는 일이다. 고요해진다는 것은 생각의 멈춤이 아니라 순리 속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일이다. 한때의 억세기만 했던 날카로움을 버리고 부드럽게 바람을 타는 은빛 억새꽃에게서 삶의 지혜를 얽는 이 가을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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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우즈베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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