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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만남과 이별, 삶의 어리석은 '잔상(殘像)'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 정일근 ‘그 후’와 니콜라 푸생 ‘아르카디아의 목동들’
사랑과 이별 앞에서 늘 어리석기만 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시인은 우리에게 지혜의 해답을 제시했다. 이렇게 말이다. 내가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라고 귀띔했다. 이 부분은 언제나 반복해 읽어도 상처가 치유된다

이진우 기자

기사입력 : 2021-10-0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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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 정일근


사람 떠나고 침대 방향 바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

이불과 베개 새것으로 바꾸고

벽으로 놓던 흰머리 창가로 두고 잔다

밤새 은현리 바람에 유리창 덜컹거리지만

나는 그 소리가 있어 잠들고

그 소리에 잠 깬다, 빈방에서

적막 깊어 아무 소리 들을 수 없다면

나는 무덤에 갇힌 미라였을 것이다, 내가

내 손목 긋는 악몽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먹은 것 없어도 저녁마다 체하고

밤에 혼자 일어나,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바늘로 따며

내 검은 피 다시 붉어지길 기다린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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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푸생 ‘아르카디아의 목동들’, 17세기,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박물관.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이혼도 그런 것 같다. 비열한 이혼도 아름다운 이혼도 있다. 그러니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다. 삶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골격을 짜는 하나의 과정이고 아픈 선택일 뿐이다. 삶의 어느 국면에서 생을 담은 물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은유 <올드걸의 시집>, 68쪽 참조)

수많은 독자들이 사랑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은유는 저서 <올드걸의 시집>에서 시인 정일근(1958~ )의 시 <그 후>를 소개한 바 있다. 다시 찾았다. 추석 연휴에 읽었다. 예전과 다르게 이젠 그림이 하나, 여백에 보이며 상상으로 겹친다. 예컨대 화가 니콜라 푸생이 그린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이 그것들 중 하나이다.

응시(鷹視)의 그림, 응시(凝視)의 시

앞의 시와 그림은 독자에게 불끈 힘을 쥐도록 부추긴다. 이 점에서 대동소이 비견이다. 그것도 우리가 시와 그림을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시선이 일치한다. 또 어깨 높이를 나란히 맞출 수밖에 없는 무기력을 전해준다.

그림 속 아르카디아의 세 목동을 먼저 보자. 매의 눈으로 살피자. 응시(鷹視)하자. 돌무덤 앞에 무릎을 구부린 파란 옷의 남자는 그 중 연장자로 보인다. 수염이 자랐다. 그것도 혼자만 덥수룩하다. 그는 지금 매눈처럼 사납게 묘비명을 오른 손가락으로 짚으며 애써 읽고자 한다. 하지만 어쩐지 잘 모르겠단 그런 표정의 눈빛이다. 이때다. 눈치 빠른 빨간 옷의 막내가 그 옆에서 나선다. 돕겠다는 얼굴로 금빛 상의와 파란 치마를 걸친 여인을 바라본다. 응시(凝視)한다. 이윽고, 여인은 입을 열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 곧, 설명해 줄 듯하다.

평생 도서관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영원히 학생으로 늙어가기를 꿈꾼다는 미술 중독자. 이진숙 작가의 그림 설명은 이렇다. 다음이 그것이다.

그림 속 아르카디아의 세 목동은 돌에 쓰여 있는 글씨를 해독하지 못해 여신에게 묻는다. 돌에 새겨진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는 무슨 의미인가? 아르카디아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했던 낙원이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낙원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나’(ego)는 누구인가? 이 문장이 쓰여 있는 곳이 이 답에 대한 힌트다. 그것은 바로 돌로 된 무덤이다. 곧 ‘나’는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낙원에까지 스며들었다. (중략) 죽음을 표현하는 푸생의 방식은 피가 튀고 해골이 적나라하게 나뒹구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림 속 설명하는 여신과 목동들의 생김새와 자세 모두 마치 고대의 조각처럼 품위 있고 우아하다. 낙원에마저 깃든 죽음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필멸은 인간 운명의 본질이다. 죽음으로 흘러가는 우리의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다. (중략) 네 명의 인물 중 두 명은 양쪽에 서 있고, 가운데 두 명은 살짝 구부린 자세로 대칭과 균형을 이룬다. 색채 역시 빨강, 노란, 파랑의 원색들이 조화를 이룬다. (이진숙 <인간다움의 순간들>, 246~248쪽 참조)

이진숙은 여신으로 말했지만, 나는 여인으로 보고자 한다. 다 이유가 있다. 여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보자. 파란 옷을 입은 남자, 덥수룩한 수염의 ‘그’가 보이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분명하다. 이를 강조하려고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같은 빛깔의 옷을 그 두 사람에게만 색칠한 것은 혹 아닐까?

정일근의 시도 마찬가지다. 시에서 화자가 바라보던 대상의 사라짐은 어떤 이별로도 다가오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화자를 응시하노라면 어쩐지 죽음의 냄새가 훅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 떠나고 침대 방향 바꾸었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라고 실토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겪는가?

그때마다 우리는 잠시 무기력해진다. 아주 잠깐, 허탈해 일상이 허우적거린다. 특히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의 어느 날인가, 이별은 더 아파서 시리다. 더욱 서럽고 외로운 법이다. 시에 “나는 무덤에 갇힌 미라였을 것이다”라는 시구가 있다. 이 구절은 마치 푸생의 그림처럼, 나의 죽음도 곧 거기에 있음을, 요컨대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를 해독하게 안내하고 암시하게 환기시킨다. 그러니까 설사 목동들이 사는 이상적인 도시 아르키디아, 무릉도원이라고 찾았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그런 메시지다.

언제가 루브르와 오르세가 빛나는 파리로 여행을 나는 계획하고 간절히 꿈꾸고 있다. 그래서 그랬는가. “두 번에 걸쳐 10여년을 파리에서 보내며 박물관에 살다시피 했다”는 미술사학자 정연복이 쓴 명저 <예술 속의 삶, 삶 속의 예술>(도서출판 등, 2020년)의 발견은 무척 반가웠다. 정연복은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에 대한 작품을 해설하면서 ‘고전주의 미학의 백미’로 평가한 바 있다. 보다 상세한 그림 해설은 다음과 같다.

네 인물의 눈길과 손의 자세는 관객의 시선을 곡선적으로 이끌면서 그들이 바라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인물들이 이루는 크고 작은 삼각형들은 단조롭지 않은 구성과 균형을 만들어낸다. 뒤쪽의 배경도 흥미롭다. 왼쪽에는 밝고 맑은 하늘이, 오른 쪽에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중략) 푸생,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그림은 말없는 시”라고 생각했다. 시가 언어로 하는 것을 그림은 선과 색깔로 보여준다고 보았다. (정연복 <예술 속의 삶, 삶 속의 예술>, 258~259쪽 참조)

그림 속에서 목동과 여인처럼 이런 사랑과 이별을 나, 해보긴 해보았던가. 그와 헤어진 후에 “먹은 것 없어도 저녁마다 체하고/ 밤에 혼자 일어나,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바늘로 따며/ 내 검은 피 다시 붉어지길 기다”리는 아픔의 시간을 당신은 가져본 적이 있던가. 시인은 독자를 향해 강렬한 한 방을 날린다. 다음이 그것이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렇다면 사랑과 이별 앞에서 늘 어리석기만 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시인은 우리에게 지혜의 해답을 제시했다. 이렇게 말이다. 내가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라고 귀띔했다. 이 부분은 언제나 반복해 읽어도 상처가 치유된다.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그’를 시적으로 비유하자면 ‘한 잔 물’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내 잔에다 새 물을 퍼 담으면 된다. 슬픔은 아주 잠시 뿐이다. 심하게 흔들리는 고독의 시간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피하거나 도망가기 참 어렵다. 그러니 정면으로 마주치자. 몸소 끙끙 앓아 보자. 해서 사소하거나 소소하지만 침대 방향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는 그것뿐이라도 무엇보다 내가 먼저 실행하고 볼 일이다. 아니 그런가?

고인(故人)에 대한 해석

초등학교 친구 어머니 부음 소식을 듣고 추석 연휴에도 장례식장을 기어코 다녀왔다. 상갓집 밥상에 차려진 몇 가지 음식을 저녁으로 먹으면서 이런저런 담소를 친구들과 오랫동안 나누었다. 그 중에 하나가 ‘고인에 대한 해석’인데, 무릇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집으로 돌아와서 정일근의 시 <그 후>를 느릿느릿 읽다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작품 <오르낭의 장례식>이 불현듯 생각났다. 서둘러 그림이 담긴 책 한 권을 서가에서 꺼냈다. 실은 엄청난 크기의 그림인데도 책에 실린 작은 사진으로 보자니 적잖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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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장례식’,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미술관.


이진숙은 쿠르베의 그림을 설명하면서 마르셀 뒤샹의 묘비명을 인용해 글을 시작한 바 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늘 튀던 작품과 삶의 방식으로 유명했던 예술가 마르셀 뒤샹의 묘비에는 “게다가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이다”라고 쓰여 있다. 미술사를 바꾼 대가의 무덤을 애써 찾았으나 그 순간의 유일한 진실은, 살아 있는 당신은 이 타인(뒤샹)의 죽음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뿐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죽음을 두고 이런 썰렁한 말을 던질 수 있으려면 죽음과 삶에 대한 관념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가능했다. 21세기의 우리는 죽음을 의학과 과학에 의지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은 종교의 문제이자 문화의 문제였다. (중략) 쿠르베의 그림은 고향 오르낭에서 얼마 전 있었던 친척의 장례식에 다녀와서 그린 것이라고 알려졌을 뿐이다. (이진숙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 61~62쪽 참조)

왜?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장례식장을 찾는 것일까. 까닭은 간단하다. 말 그대로 ‘나’와 ‘죽은 자’의 관계, 즉 연고(緣故)가 있기에 그렇게 굳이 찾아가는 것이다. 고인을 두고, 한자로 쓰자면 ‘故人’이라고 적는다. 사전적 의미로는 ‘죽은 사람’이 맞다. 하지만 뜻이 좁다. 확장해서 넓게 읽어야 한다. 한시에선 고인을 두고서 ‘친구’로 번역한다. ‘오래전부터 사귀어 온 친구’가 낱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오래전부터 연고가 있었던 사람’이 ‘고인(故人)’의 진정한 뜻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대충 이런 농담을 친구들과 상갓집에서 주고받았다.

“내세를 의심할 때 인류는 불멸이 아니라 세속의 행복을 좇게 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bal Noah Harari, 1976~ )가 뱉은 말이란다. 말인즉 명언처럼 수용된다. 푸생의 그림을 봐도 그렇고, 쿠르베가 그린 그림도 필자는 내세를 의심하지 않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런 면모가 정일근의 시의 행간에도 함축되어 있다. 이를 나는 강조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일말의 사건을 겪은 당사자의 ‘그 후’에 주목해야 한다.

정일근의 시는 확실히 세속의 행복을 좇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내세(來歲)를 전망하며 아픔을 당당히 참으며 견디려는 삶의 모습이 명징하다. 이미 한 번 떠난 사람은 나와는 연고가 깡그리 지워지는 법이다. 다만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내세(來世)의 만남을 기대는 것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시와 그림은 맑다. 맑은 물이다. 물이 깨끗하니 내 영혼의 아픈 상처를 씻을 만하다. 씻고 난 후에 내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맑지 아니하고 흐려지는 어느 날이 오거든 다시 시를 만나고, 그림을 보면 저절로 투명해지는 시간이 온다. 아무튼 “내 검은 피”가 오래지 않아 “다시 붉어지”는 시간까지 어쨌건 기다리는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장례식장을 다녀오면 육신은 피곤하지만 되레 정신은 또렷해진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라는 은유 작가의 투명한 말이 필자는 좋았다. 인연을 쓴다는 것은 연고를 구한다는 뜻이다. 구하면 얻을 것이라고 했던가. 반대로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인연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는 내게 이미 ‘타인’이 되는 거고 장례식장에 ‘고인’으로 보일 뿐이다. 그가 어느 날 내게 와서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라고 밤새 뒤척이던 날이 다 지나가면, 아름다운 이별과 추억으로, 상처가 아문 자리로 남으면서 더욱더 단단해지리라.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어떤 이별은 계속 나를 검게 슬프게 한다. 정일근은 “빈방에서/ 적막 깊어 아무 소리 들을 수 없다면/ 나는 무덤에 갇힌 미라였을 것이다”라는 구절로서 시가 언어로 그리는 상상력을 독자에게 기막히게 제시한다. 선물한다. 그 덕분에 나는, 니콜라 푸생의 그림을 나만의 시선으로 한가위 달밤에 홀로 잠 못 이루면서도 천천히 감상할 수 있었다. 시를 읽고 그림을 감상하는 그 시간은 행복하다. 벅차서 내가 사랑스럽다. 따라서 깊고 푸른 가을밤. 홀로 잠에서 깨어나는 빈 방이 있어 실은 우울하나 역설적으로 밝아지는 것이다. 어찌 그것들에 넉넉하게 감사하지 않겠는가.

◆ 참고문헌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09.

은유 <올드걸의 시집>, 서해문집, 2020.

이진숙 <인간다움의 순간들>, 돌베개, 2020.

이진숙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 돌베개, 2021.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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